이상국기자
2007년 장윤현감독 영화 '황진이'의 송혜교.
이제 황진이의 명성을 드높인 두 남자를 만날 때가 되었다. ‘성옹지소록’(허균)에는 황진이가 입버릇처럼 말했다는 인용문 하나가 있다. “지족 노선사가 삼십 년 동안 면벽했지만 내게 짓밟힌 바 되었다. 오직 화담 선생만은 접근하기를 여러 해에 걸쳤지만 종시 어지럽지 않았으니 이는 참으로 성인이다.” 이 말이 후세 작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두 사람을 유혹하는 ‘황진이 야동’을 양산하게 했다. 황진이의 말이 두 사람을 비교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는 바람에, 이야기가 부풀려지면 질 수록 지족선사는 형편없는 인간이 되었고 서경덕은 성인에 가까워졌다. 김탁환은 지족선사가 천하의 위선자로 낙인 찍히는 것이 부당하다고 여겼는지 그의 위신을 찾아주기로 작심한 듯 다른 관점을 시도한다. 그 부분을 살펴보자. 지족선사는 삼십 년 면벽수행의 고집이 보이지 않을 만큼 부드럽고 친절한 분이었지요. (......) 사흘을 그곳에서 묵었지요. 지족선사와 나눈 말들을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지만 떠오르는 풍경은 하나 있습니다. 둘째 날 오후부터 가랑비가 내렸습니다. 지족선사는 손수 푸르게 피어나는 안개와도 같은 차를 끓였지요. 솔잎차를 앞에 놓고 빗방울에 빗대어 서로의 마음을 떠보았답니다. 불제자는 빗방울로부터 벗어나려 했고 나는 그 빗방울을 온몸으로 맞으려 들었지요. 빗방울에 사로잡히면 모든 것에 사로잡힌다고 하기에 빗방울 하나도 잡지 못하는 이가 어찌 억겁의 연을 끊을 수 있겠느냐고 따졌답니다. 지족선사는 찻잔의 떨림을 조용히 응시하며 말을 아꼈지요. 깨달음이 아무리 깊다 한들 도의 문을 밀고 들어올 중생이 진흙에 코를 박고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더 날카롭게 다가섰답니다. 욕심이 크면 집착이 두터운 법인가요. 설령 떼어내기 힘든 집착이라 하더라도 그 욕심을 만들어낸 먼지와 티끌을 쓸어내야 맑고 깨끗해지지 않겠습니까. 지족선사는 더 높은 봉우리로 올라갈 마음 뿐이었고 황모(황진이)는 날아오르고 싶지 않았습니다. 땅바닥을 배로 밀며 기어다니는 이들의 눈물과 한숨을 사 년 동안의 유랑에서 직접 보고 들었던 것입니다. 지족사의 풍광을 부슬부슬 쓰다듬는 가랑비가 누군가의 숨통을 턱턱 막을 수도 있지요. 대사님은 틀림없이 더 큰 도를 깨우쳐 더 높이 오르시겠지만 자비로운 걸음에 밟혀 피를 토하는 미물은 어쩌시렵니까. 지족선사는 결국 마음 바닥의 그림자를 드러냈습니다. 이 작은 절이 움직인다 하여 세상이 달라지겠소이까. 김탁환의 '나, 황진이'(2006)에서 인용.황진이의 고백체로 되어 있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리송하다. 결국 마음 바닥의 그림자를 드러냈다는 그 말이, 파계를 의미하는 것이던가. <center><div class="slide_frame"><input type="hidden" id="slideIframeId" value="2016081708141946580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