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산부 배려석에 한 남성이 앉아 있다.
[아시아경제 이현주 기자, 문제원 기자] # 33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에 한참을 걸어 지하철역까지 내려왔다. 땀방울이 코끝까지 맺힌다. 승강장 안전문(스크린도어)과 함께 전동차 문이 열리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온몸을 휘감고 나서야 뜨거운 기운이 조금은 사라진다. 한 숨을 돌리고 주위를 살펴보니 평일 낮인데도 빈자리가 없다. 전동차 칸 끝에 있는 노인석 빈자리에 잠시 시선이 머물렀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중간 쪽으로 걸어간다. 커플처럼 보이는 남녀가 오붓하게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뒤로 살짝 빈 좌석이 보인다.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가니 웬걸. 핑크빛 임산부 배려석이다. 잠시 머뭇거렸지만 거리낌 없이 자리에 앉는다. "지하철에서 임산부는 잘 못 봤는데 뭐. 혹시 임산부가 앞에 서 있으면 비켜주면 되겠지." 마음이 조금 놓인다. 스마트폰을 꺼내, 게임 애플리케이션을 실행시키고 고개를 숙인다.한참 게임을 하다 귀에 꽂은 이어폰 너머로 현재 역을 알리는 안내소리가 흘러들어온다. "어디쯤 왔지?" 고개를 들어 천장에 달린 모니터를 보니 아직 세 정거장이 남았다. 게임을 잠시 멈춘 김에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야 내 주변에 3~4명의 남녀가 서있는 걸 확인한다. 다행히 몸이 불편하신 분이나 나이가 많은 어르신은 보이지 않는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눈에 띄었지만 육안으로 봐서는 임산부인지 확인하기 힘들다. "배가 조금 나온 것 같기도 하고…. 에이, 임산부면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겠지" 시선을 다시 스마트폰으로 돌린다.# 임신 3개월차. 아직까지 많이 표시가 나진 않지만 자세히 보면 아랫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출근을 위해 지하철을 탄다. 오전 8시가 다 된 시각 2호선은 이미 만원이다. 혹시나 자리가 있을까 싶어 임산부 배려석 쪽으로 가봤지만 나보다 젊어 보이는 여성이 앉아 화장을 하고 있다. 임산부라서 서 있기 힘들다고 비켜달라고 해볼까. 임신이 무슨 벼슬이냐며 쏘아붙일지도 모른다. 임신 9개월차인 친구 A는 오히려 배가 나온 다음부터는 임산부 배려석을 피한다고 했다. 주변에 서 있으면 괜히 자리를 비켜 달라하는 것 같아 민망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임산부용 가방고리를 받아놨지만 어차피 양보도 받지 못할 것 같아 무용지물이 된 지 오래다. 차라리 이럴 거면 부산 지하철처럼 여성전용칸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나마 몸이라도 덜 부딪혔으면. 아직 내려야 할 정류장 3개가 남았다. 머리가 핑 된다. 잠시라도 앉고 싶다. 화장하던 젊은 여자가 내린다. 그러나 역시 내 자리가 아니다. 스마트폰에 열중하던 남성이 그 자리를 이어 받는다. 출근하는 40분 동안 5분만이라도 앉아서 가고 싶다. 너무 큰 욕심일까.서울 지하철 1~8호선 중 임산부 배려석은 7140석. 서울시에 따르면 임산부 배려석은 임산부를 위해 비워두는 자리다. 그러나 실제 임산부가 앉아 있거나 비어 있는 모습은 보기 힘들다.평일 낮 시간 실제 지하철을 타고 취재해 본 결과 중년 남성과 여성이 자리 독차지하고 있었다. 다른 좌석이 비어 있어도 대부분 끝자리 기둥에 기댈 수 있는 임산부 좌석에 앉았다.
▲중년의 두 남성이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있다.
시청역에서 만난 20대 남성은 "임산부 배려석인 줄 알았지만 주위에 임산부가 있으면 비켜주는 자리라고 생각했다"며 "지하철은 항상 붐비고 임산부를 지하철 안에서 자주 못 봐서 임산부 배려석에 평소에도 잘 앉는다"고 말했다. 50대 남성은 "지하철에 임산부 배려석 있는지 몰랐다"며 "임산부가 있어도 비켜줘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고도 했다.사실상 임산부 배려석은 무용지물이다. 임산부 역시 부담스러워 자리를 피하고 일반 승객들도 문제의식 없이 자리에 앉는다. 대부분 임산부들이 임산부 배려석 근처에 가는 것조차 꺼렸다.여성단체들도 오히려 이 같은 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한 여성단체 관계자는 "이러한 제도는 또 다른 편견을 나을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말했다.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임산부 배려석에 앉은 남성의 사진을 여과 없이 올려 문제가 된 적이 있다.정작 앉아야 할 임산부는 배려를 받지 못하고 괜히 앉았다고 욕만 먹게 되는 불편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앞의 사례는 이해를 돕기 위해 1인칭 시점에서 작성한 것입니다.)이현주 기자 ecolhj@asiae.co.kr문제원 기자 nest2639@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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