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과 멋] 먹방과 집밥

대학원 시절, 학과장님은 우리 조교들을 무지막지하게 부려먹고는 그 끝에 꼭 먹을 것을 사주셨다. 아무래도 배만 곯지 않게 해 주면 조금 괴롭혀도 상관없다는, 옛날식 사고방식이 작용하였으리라. 당시야 나를 비롯해 조교들 불만이 많았으나 지금 생각하면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보릿고개, 전쟁, 부패한 정권 등의 험기를 지나면서 허기를 면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마다할 형편이 못됐을 테니 말이다. 그만큼 한 끼의 식사야말로 우리에게 절대 절명의 존재라는 생각도 든다. 15년 전, 아내한테서 반강제로 부엌을 빼앗을 때 어쩌면 내 심정도 대학원 시절 학과장님과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가난한 번역쟁이 놈이 다른 건 몰라도 먹거리 하나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 아내가 직장 생활 때문에 부엌일에 신경 쓰기 어려운 반면 난 오랜 실업자 생활 끝에 집에서 막 번역을 시작한 터라, 합리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먹방, 쿡방이 유행이란다. 사실 처음에는 신기했다. 타인이 요리하고 타인이 먹는 모습을, 그것도 TV나 인터넷 방송으로 구경한다는 사실도, 음식을 입이 아니라 눈과 귀로 즐긴다는 발상도 재미있었다. 예전에는 남이 돈을 세거나 먹는 모습 구경하는 것보다 한심한 일도 없다 했건만….나도 몇 년 전부터는 이따금 SNS에 내가 만든 음식을 사진으로 찍어 레시피, 이야기와 함께 올리곤 한다. 다 늙은 남자가 만드는 집밥이기에 어느 정도 뭇 남성들을 계몽(?)한다는 선구자적 기대감도 있지만 그보다는 먹방, 쿡방이 누군가에게 대리만족이 되고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산업사회가 가속화하면서 가정은 해체되고 혼자 사는 사람이 많아졌다. 아니, 함께 산다고 해도 함께 식사를 할 시간을 찾지 못해 이른바 혼밥(혼자 먹는 밥), 혼술이 크게 늘었다지 않는가. 텅 빈 방이나 주점에서 혼자 식사를 하는 것보다 어쩌면 TV, 인터넷을 틀어놓고 먹방과 쿡방이라도 보며 외로움을 달래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주 아주 어릴 적, 아침에 잠에서 깨면 식사 준비하는 소리부터 나를 반겼다. 부엌칼로 도마를 때리는 소리, 부글부글 찌개 끓는 소리, 맛있는 생선구이 냄새…. 안도감과 포근함 때문이었을까? 그럼 나는 어느 결엔가 스르르 다시 잠이 들곤 했다. 이제는 너무도 아련한 기억이지만, 매일 매일 집밥을 차려내면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나도 그런 포근한 기억으로 남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누군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한 끼의 식사”라는 표현을 썼다. 그렇다, 한 끼니의 식사는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그 그릇에 함께 담아내는 기억, 추억은 남는다. 만일 어렸을 적 그 기억이 없었던들 내가 오랜 세월 이토록 정성껏 하루하루 밥상을 차려낼 수 있었을까? 구경거리로서의 요리는 조리 과정만을 보여주지만 실제 삶으로서의 요리는 식재료 준비에서 설거지, 식사 후 정리에 더 손과 마음이 가야 한다. 더욱이 대부분의 식재료를 텃밭에서 구하는 터라 내 음식은 밭을 가꾸고 씨를 뿌리고 잡초 뽑는 과정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셈이다. 적어도 나한테 요리와 식사는 공산품처럼 소비하는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혼신을 다해 살아가야 할, 그 자체로 소중한 삶이다. 나는 텃밭을 가꾸고 식자재를 다듬고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하면서, 그리고 가족은 그날 먹고 싶은 음식을 주문하고 함께 얼굴을 보고 함께 얘기를 하고 함께 식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가족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배우고 추억을 쌓아간다. 내게 요리는 그런 의미다. 가족의 이야기, 가족의 추억을 만들어내는 일.영화 <심야식당>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죽은 사람의 유해를 찾지 못해 유골함에 유골 대신 흙을 담아 제를 지내는 장면인데, 누군가 “그래도 가짜가 빈 것보다는 낫다”고 자조적으로 중얼거린다. 우리가 먹방, 쿡방에 심취하는 것도 그래서가 아닐까? 비록 가짜일지라도 텅 빈 것보다 나으니까. 음식을 만들어주는 사람도, 함께 먹을 사람도 없으니 이렇게 대리만족이라도 필요한 게 아닐까? 먹방도 좋고 혼밥도 좋다. 시대는 게으름을 허락하지 않고 가족과의 여유로운 식사는 어쩌면 나태하고 값싼 사치로 보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우리에게도 한 번쯤은 누군가 정성스레 한 끼의 식사를 준비하고 가족과 함께 웃으며 밥상을 마주하던 시절과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 가슴 포근한 '진짜' 기억으로부터 너무 멀리 벗어나지 않기를 빈다. 조영학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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