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동여담] 언어를 상실한 소설가의 그림

 병역의 의무를 눈앞에 둔 문학청년 둘이 있다. 한 명은 불문학과 다른 한 명은 독문학과이다. 불문학과가 독문학과를 꼬신다. 신춘문예에 도전하자고. 운이 좋아 당선되면 학비를 벌수 있고, 떨어지면 머리 깎고 군에 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둘은 저지른다. 한 명은 당선이 되어 문인이 되었고 한 명은 낙방하여 군인이 되었다. 불문과는 김승옥, 독문과는 이청준이다. (그렇다고 김승옥의 소설이 이청준의 소설보다 훨씬 탁월하다는 뜻은 아니다. 일필휘지든 절차탁마든 글을 쓰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연습 삼아 쓴 <생명연습>으로 김승옥은 신춘문예에 당선되자 회피하고 싶었던 문학이란 놈에게 덜미를 잡혔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것은 문학을 전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어와 독일어는 고등학교에서 배웠으니 대학에서 불어를 익혀 외교관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무진기행> <서울, 1964 겨울> 등 걸작행진을 이어가던 김승옥은 소설만 써서는 밥벌이가 어렵다며 영화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나리오를 써서 국내 최고 권위의 영화상 각본상을 받고 내친김에 감독으로 데뷔하여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아내가 영화감독이 되는 것을 극구 반대하자 아내의 의견을 받아들여 시나리오만 쓰기로 한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어떤 감독의 이름이 떠오른다. 나는 그의 스캔들에는 관심이 없지만 그의 새 영화를 더 못 볼 것 같아 걱정이다.) 발표하는 소설마다 한국문학의 이정표가 되었고 김승옥 스타일이라는 브랜드를 만들어 냈으며 많은 문학상을 수집하듯 받아갔다. 1980년대 군부의 등장으로 자신의 소설이 잘려 나가는 것을 보고 절필을 선언하기까지 그는 한국문학의 대체 불가한 작가였다. 2003년 소설가 이문구의 부고를 접한 그는 친구의 마지막 길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서다 쓰러져 지금까지도 말을 못하고 있다. 뇌졸중은 극복했지만 작가의 생명인 언어를 잃었다. 지금도 의사소통은 문장이 아닌 간단한 단어로 필담을 나눠야 한다. 그런 그가 그림을 그린다. 틈틈이 그린 수채화로 이번 주말 전시회를 연다.  한국문학 불세출의 천재가 강요된 침묵 속에서 밝히는 창작의 비밀. 뭐 이런 거창한 걸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는 원래 미술에도 재능이 있었지만 문단에서의 김승옥과 화단에서의 김승옥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단지 그를 흠모하는 애호가로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안개를 만나듯,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가 보고 싶은 것이다. 언어를 상실한 소설가의 그림 속에서. 임훈구 편집부장 keygrip@  임훈구 편집부장 keygrip@<ⓒ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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