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새엄마와 콩쥐소녀의 비극

빈섬의 세상읽기 - 왜, '동화'는 현실로 튀어나왔을까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 남자의 딸, 여자의 딸 = 남자와 여자는 2008년 무렵에 결혼을 했다. 두 사람 다 두 번째 결혼이었다. 남자에게는 초등학교 1학년 딸 노을이가 있었고, 여자에겐 세 살 위인 4학년 딸 햇살이가 있었다. 첫 결혼이 아프게 끝났기에 두 번째 가정은 아름답게 꾸미고 싶었던 남자와 여자는, 각자의 다른 소생인 딸들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새롭게 생긴 언니와 새롭게 생긴 동생에게 친자매처럼 지내도록 부부는 마음을 썼다. 시간이 흐르면서, 남편이 유독 친딸 노을에게 각별한 듯한 기색을 보이자 아내는 아빠의 사랑을 덜 받는 자신의 친딸 햇살이가 안타깝게 여겨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햇살에 대한 연민은 노을에 대한 증오로 바뀌기 시작했다. 남편에게 노을이만 이뻐한다고 불평을 늘어놓고, 노을이에 대한 험담을 입버릇처럼 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이런 아내가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아내와 친딸을 떼어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그 무렵이었다. 노을이를 친할머니에게 보내기로 했다. 이후 집안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새 아내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가 태어났을 때, 남편은 몹시 기뻤다. 행복한 가정이었다.▶ 네가 없으면 행복할 수 있을텐데 =그런데, 친할머니댁에서 살던 노을이가 어느 날 집으로 돌아왔다. 할머니가 나이가 들어 힘겹다고 소녀를 돌려보낸 것이다. 노을이는 열네살이 되어 있었고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이때부터 다시 멎었던 전쟁이 시작되었다. 여자는 애써 일궈놓은 화목한 가정을, 느닷없는 불청객이 모두 빼앗아갔다고 여겼다. 노을이만 없으면 다시 행복할 수 있을텐데 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녀에게 노을이는 딸이 아니라, 적이었고 웬수였다. 노을이에게 엄마는 무엇이었을까. 콩쥐팥쥐전에 나오는 그대로이다. 아빠는 직업상 출장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노을이는 밥상에 앉지 못하고 혼자서 밥을 먹었다. 가족이 삼겹살 파티를 벌일 때도, 노을은 뒤늦게 혼자서 남은 고기를 먹었다.
어느 날 노을이는 배가 고파 싱크대 서랍에 들어있던 단백질 분말을 꺼내 먹었다. 엄마가 다이어트를 위해 사놓은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소녀는 몹시 두들겨 맞았다. 노을이의 옷장에서 과자봉지를 발견한 엄마가 무슨 돈으로 이걸 샀느냐고 캐묻자, 아이는 동네 편의점에서 훔쳤다고 대답했다. 엄마는 몹시 화를 내며 단단히 버릇을 고쳐주겠다면서 소녀의 머리칼을 잘랐다. 허벅지를 꼬집고 머리를 때렸다. 엄마는 노을이에게 식모처럼 일을 시켰다. 빨래와 취사, 청소를 모두 시켰다. 또 동생을 돌보는 일도 소녀가 할 일이었다. 집안일을 하느라 일주일간 학교를 빼먹을 때도 있었다. 아빠는 이런 일을 까맣게 몰랐다고 한다. ▶ 우리 아빠는 죄 없어요 = 하지만 노을이는 아빠에 대한 원망의 소리는 전혀 하지 않았다. 소녀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지푸라기가 아빠라고 생각했을까. 지난해 여름 아빠와 엄마, 그리고 햇살이와 아들 별빛이는 인천 펜션으로 여행을 떠났다. 노을이는 춘천의 집에 남겨놓았다. 엄마는 홀로 집에 있는 노을이를 감시하기 위해 CCTV를 설치해놨다. 엄마는 소녀에게 “집안이 돼지우린데 대체 어딜 돌아다니느냐”고 고함을 지르며 세탁실에 벌을 서고 있으라고 명령을 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엄마는 노을이가 제대로 벌을 서고 있지 않았다면서 머리를 쥐어박으며 얼굴을 꼬집었다. 종아리를 10대 때렸다. 이 상황을 아빠는 몰랐을까. 작년 9월 아들 별빛이가 아파서 병간을 해야 한다면서 노을이의 수학여행을 못가게 했던 일도, 출장으로 바빴던 가장은 모르고 있었을까.▶ 엄마에겐 집행유예 = 춘천지법은 상해 및 아동복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마흔한살의 ‘엄마’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고 풀어주었다. 아동학대 재범 예방 강의를 80시간 수강하게 하고 보호관찰을 명령했다. 피고의 죄가 무겁지만 전과가 없고 반성하고 있는 점, 그리고 또다른 두명의 자녀가 있는 점을 참작했다고 법원은 밝혔다. (아이들의 이름은,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콩쥐팥쥐 모티프 = 콩쥐팥쥐는 전세계에 퍼져있는 민담(民譚)이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중국 9세기 당나라의 '유양잡조'라고 한다. 베트남에는 '카종과 할록', 필리핀에는 '마리아'라는 제목의 설화가 있고, 아메리카 인디언의 '칠면조 소녀', 아일랜드의 '얼룩소', 아프리카 하우사족의 '처녀와 개구리, 그리고 추장 아들'도 유사한 이야기이다. 러시아의 '부레뉴슈카, 아름다운 바실리아'도 보인다. 유럽에서는 '신데렐라'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아르메니아 지방의 설화에서도 보이고, 이탈리아에선 '고양이 신데렐라'로 나온다. 이탈리아의 파르마 지방에서 쓰는 '센드라외울라'도 신데렐라와 비슷하다. 프랑스에서는 '상드리옹, 혹은 작은 유리구두' 스토리로 전하며, 독일에서는 '재투성이 소녀'라고 해서 '신데렐라'의 의미를 풀어쓰고 있다. 영국에서는 '이끼옷'이란 이름으로 전한다. 신데렐라의 구두가 '유리구두'로 되어 있는 것은 프랑스 버전 밖에 없다고 한다. 원래는 털가죽 슬리퍼(vair pantoufle)였는데 vair(회색과 흰색이 섞인 다람쥐 털가죽 구두)를 verre(유리)로 오해하여 스토리가 바뀐 것이라고 한다. 신데렐라 스토리가 동화로 정리한 사람은 1697년 프랑스 작가 샤를 페로(Charles Perraut)이다. 신데렐라는 계모의 핍박이 강조되지만, 왕자님을 만나 행복하게 되는 해피엔딩이 부각되면서 동심의 환상을 자극한다. 우리의 가엾은 콩쥐와는 결말이 다르다.세계 역사 속에서 이렇게 공통적으로 콩쥐팥쥐 모티프가 등장하는 까닭은, 재혼이라는 상황과 이로 해서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 생겨나는 갈등이 인류 역사적으로 보편적인 경험을 이루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새엄마가 들어오고, 친자식과 의붓자식에 대한 차별로 빚어진 고통들이 일정하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개 '젊고 예쁜' 새엄마는 악의 상징이 되며, 그 대척점에 서있는 전처의 자식들은 피해자이자 착한 주인공이 된다. 남성권력이 한눈을 파는 공백 상태에서 벌어지는, 질투심 강한 모성의 광기를 '동화' 속에까지 아로새긴 것은, 인상적이다. 남성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부정적 시선이 이런 스토리 속에서도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 콩쥐팥쥐나 신데렐라는, 뱃속으로 낳지는 않았지만 '가슴으로 낳은 자식'을 평생의 정성으로 키워온 상당수의 새엄마들까지 편견을 갖게 만드는 부작용을 지닌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이혼사회의 준비되지 않은 새 부모들 = '계모 민담'은 축첩사회나 남성중심의 일부다처사회의 그림자라 할 수 있다. 아빠라는 절대 권력 아래서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적대적인 양 축'이 생겨나고 그 갈등이 일으키는 파장이 이야기를 밀고 간다. 최근의 가정 폭력은, 그것과는 조금 양상이 다르다. 새엄마라는 독특한 지위가 사회적으로 확산된 것은 이혼과 재혼이 상당히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다. 이혼과 재혼이 결혼 당사자들의 문제만이 아닌, 가족 특히 자식들의 삶의 기반과 환경을 결정하는 중대한 문제라는 것이, 비교적 간과되어 왔다. 새엄마나 새아빠는 태생적으로 악이 아니라, 격변한 삶의 조건들 속에서 적응 미숙으로 '악화'되어가는 과정을 겪는다. 행복에 대한 편협한 집착이 아동 학대를 부르고, 핏줄 중심의 원초적 모성애와 부성애가 배다른 자식에 대한 불신과 증오를 키우면서, 춘천의 불행한 가정과 같은 사태를 빚었을 것이다. 두 사람 뿐만이 아니라 두 가정이 결합하는 재혼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그 결합을 꾸려갈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기에, 그저 생물학적인 충동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 하지만 모든 새엄마가 팥쥐엄마는 아니다 = 최근 들어 아동학대 사건이 잇따르고 있는데, 그중 10건 중 8건은 친부모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라는 통계가 있다. 계부모의 학대는 상대적으로 드물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재혼가정의 숫자가 아직 그리 많지 않다는 점으로 볼 때, 숫자로 이해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새롭게 결합한 부부의 경우, 어렵게 얻은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지켜내야 한다는 강박이 오히려 걸림돌처럼 여겨지는 의붓자식에 대한 적개심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많은 동화책이 드러낸 '새엄마 콤플렉스'는 어린 시절을 지나면서 마음 속에 잠복해 있다가, 이런 사건이 터지면 뇌관을 건드린듯 다시 폭발한다. 춘천 새엄마가 배다른 자식에게 가했던 잔혹하고 사나운 가학행위는, 다시 이 땅에서 조심조심 살아가는 새엄마들의 입지를 좁히고 한숨을 키울 것임에 틀림없다. 새엄마의 자식으로 자라나는 아이들 또한 '팥쥐'가 아니라, 무죄하고 억울한 존재들이다. 분노의 대상을 섣불리 확장하는 것 또한 폭력이 아닐까. 춘천의 새엄마는 '재혼'이라는 자신의 주어진 삶을 잘못 걸어간, 한 개인일 뿐이란 생각을 해본다.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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