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우래기자
[아시아경제 노우래 기자] '긍정의 힘'이 넘친다.
'늦깎이 신인' 최혜정(24)이다. 프로 데뷔 6년 만에, 그것도 올 시즌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최종전 포스코챔피언십에서 생애 첫 우승을 일궈냈다. 18세인 2009년 일찌감치 정회원이 됐지만 지난해까지 2부 투어를 전전했고, '5전6기' 끝에 가까스로 시드전을 통과했다. 25일 경기도 이천 휘닉스스프링스골프장에서 내년 시즌을 대비해 벌써부터 훈련에 돌입한 최혜정을 만났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 "이보다 더 극적일 수는 없다"= 초반 9개 대회에서 무려 여섯 차례의 '컷 오프'와 한 차례 기권, 시드전으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다. 성적을 내야한다는 조바심과 2부투어 강등이라는 불안감이 겹쳤다. 결과적으로 멘털 트레이닝이 약(藥)이 됐다. "아직 어린데 무엇을 못하겠냐는 오기가 생겼다"며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니 일이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고 털어놨다.
실제 반전이 일어났다. 지난 10월 OK저축은행에서 5위를 차지해 상금랭킹을 68위로 끌어올렸고, 문영퀸즈파크레이디스에서는 한 선수가 등판을 포기하면서 막판에 출전권을 얻어 26위에 오르는 행운이 따랐다. 상금랭킹 60위 이내 선수만 나설 수 있는 ADT캡스 4위, 이어 포스코챔피언십 우승으로 '신데렐라'가 됐다. 최혜정 역시 "한 편의 영화 같았다"고 했다.
▲ "아버지는 톰?"=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 최창수씨의 물류창고에 만든 미니연습장에서 골프를 시작했다. '보기플레이어'인 아버지가 스승이라는 게 아이러니다. 하지만 아버지와의 관계는 여전히 톰과 제리다. 대판 싸우고 난 뒤 눈물을 흘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아버지 혈액형인 B형 남자와는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도 꼭 붙어 다니고 있다.
아버지가 어려울 때마다 버팀목이 됐기 때문이다. 최혜정은 국가대표 경험이 없다. '엘리트코스'를 밟지 못해 서러웠고, 2011년에는 발목 인대 수술을 받는 시련을 겪었다. 올해 환갑인 아버지를 보면 그래서 마음이 더 짠하다. 막판에 무너지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포스코챔피언십 최종일 우승에 근접한 16번홀부터 가족들은 이미 울기 시작했고, 아버지의 눈에도 이슬이 맺혔다. "이제야 장녀 역할을 한 것 같다"고 했다.
▲ "당당한 루키"= 다른 루키들에 비해 5살이나 많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굳게 믿었다. 강원도 평창 보광휘닉스파크의 스키 슬로프를 걷다가 얻은 교훈을 꺼냈다. "위를 쳐다보면 힘들어서 걸을 수가 없지만 발만 내려다 보고 묵묵히 걷다보면 정상에 도달한다"는 최혜정은 "산에 오르는 것처럼 한 길을 꾸준히 가다보면 꿈을 이룰 수 있다"며 "빠름과 늦음에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설명했다.
이제는 우승 이후 기업의 스폰서 후원 '러브콜'이 이어지고 있다는 게 자랑거리다. 프로 데뷔 이후 메인스폰서는 고사하고 의류 지원도 받지 못하는 처지였다. 정규 투어에 합류한 올 시즌 역시 모자 앞이 텅텅 비었다. "돈을 더 받는 건 중요하지 않다"며 "제가 롱런할 수있고, 이미지를 업그레이드 시켜줄 수 있는 후원사를 찾는 게 중요하다"며 고심하고 있다.
▲ "40세까지는 뛰어야죠"= 지난 3월 함상규 트레이너를 만난 뒤 '웨이트트레이닝 예찬론자'가 됐다. 대회가 있을 때는 일주일에 세 차례, 대회가 없을 때는 다섯 차례나 웨이트트레이닝에 공을 들이고 있다. 선수들의 체력이 고갈된 하반기에 오히려 성적을 낼 수 있었던 비결이다. "웨이트트레이닝을 받은 뒤 힘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게 됐고, 밸런스도 좋아졌다"고 소개했다.
실제 드라이브 비거리가 늘었다. 지난해 평균 210야드의 '짤순이'가 올해는 239야드를 찍었다. 아이언을 두 클럽 이상 짧게 잡으면서 버디 기회가 늘어났다. 내년 목표는 3승, 꿈을 크게 잡았다. "거북이처럼 오래 내 가치를 높여가는 선수가 되고 싶다"며 "40세까지 투어에서 영향력이 있는 선수가 되고 싶다"는 포부를 곁들였다. 인터뷰 직후 트레이너와 함께 다시 구슬땀을 흘렸다. "내년에는 터미네이터가 돼서 돌아오겠다"고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