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정현 중앙대 경영학 교수
내가 대학을 다녔던 80년대는 암울한 '어둠의 시대'였다. 대학 내에는 사복경찰과 '백골단'(하얀 헬멧을 쓰고 가죽장갑을 낀 건장한 무술 경찰)이 진을 치고 있어 우리들은 이들의 눈치를 보며 숨죽여야 했다. 이들은 시위가 벌어지면 최선두에 뛰쳐나와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짓밟았다. 여학생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고 다니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들은 말 그대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도서관 앞 벤치에 몰려 앉아 있다가 예쁘장한 여학생이 걸어오면 다짜고짜 검문을 했다. 가방이나 핸드백을 열어 보라고 윽박지르고 핸드백의 내용물을 꺼내 히히덕거리곤 했다. 여학생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개진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이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는 남학생들도 비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여린 여학생이 그토록 모욕을 당하고 있는 판에 백골단의 폭력이 무서워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데서 오는 굴욕감은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런 날은 대학 주변의 술집에 모여 울분을 토하며 고래고래 운동가요를 부르곤 했다. 폭력의 화신이었던 백골단에 대한 공포는 민주화가 된 다음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친구, 선후배와 가두시위라도 나가던 날에도 그 공포감은 여전히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아무리 민주주의라는 대의명분이 있다고는 하지만 저 멀리 백골단이 보이면 머릿속에는 두려움만이 가득했다. 그들이 뛰어오면 이미 대열은 무너지고 학생들은 앞 다퉈 살길을 찾아 도망 다녔다. 머릿속에 각인돼 있는 원초적인 두려움은 이토록 강한 것이어서 그 어떤 정당성과 논리도 이를 희석시킬 수 없었다. 2000년대 초반 귀국해 대학생들을 보면서 의아한 점이 있었다. 유학을 다녀온 새에 한국 사회는 민주화되었고 대학 캠퍼스는 내가 꿈에 그리던 자유로운 캠퍼스가 돼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 꿈같은 캠퍼스에서 대학생들은 위축되고 왜소한 존재가 돼 가고 있었다. 그 의문은 많은 제자들과 면담을 하고 나서 비로소 풀렸다. 이들의 의식의 근원에는 1998년 외환위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당시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이었던 그들에게 든든한 부모가 무너지는 모습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해고되거나 가게 문을 닫는 등 하루아침에 가정이 무너지는 모습은 이들에게 크나큰 두려움으로 남았다. 이들 세대의 트라우마를 알게 된 다음부터 '너희들은 왜 그렇게 나약한가'라고 책망하지 않게 됐다. 대신 작은 도전부터 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게 됐다. 지금의 대학생은 2000년대 중반보다 더 심한 공포감에 싸여 있다. 이들은 취직이 되지 않은 채 대학을 쫓기듯 밀려나가는 선배들을 지켜보고 있다. 서울 소재 대학은 세 명 중 한 명이, 그리고 지방대학은 두 명 중 한 명의 학생이 무직인 채 대학문을 나선다. 운 좋게 취업에 성공했다고 해도 상당수가 비정규직이다. 한국 사회는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올라오는 사다리가 없어 한 번 비정규직에 빠지면 헤어 나올 방법이 없다. 내가 아는 지방 대학의 선배 교수님이 있다. 그 분은 정치적으로 보수주의자임에도 나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우리 대학의 학생은 다수가 프롤레타리아의 자제로, 이들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어요. 대학 들어올 때까지 사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고 결손가정 출신도 많고요. 이런 학생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는 말이 차마 떨어지지 않아요" 이런 상황의 우리 젊은이들에게 아프니까 청춘이라거나,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훈계는 가혹한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는 80년대 대학 시절의 나에게 백골단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이야기와 같다. 시련은 인간을 강하게 만든다고 하지만 인간을 두렵게 하기도 한다. 더구나 시련을 극복한 후에 더 나은 삶과 공평한 대가가 기다릴 것이라는 희망이 없다면 더더욱 시련에 도전할 이유는 없다. 지금 세대는 삼포세대(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를 넘어 오포세대(인간관계, 집), 칠포세대(꿈, 희망)라고도 불린다. 이런 젊은이들에게 도전하라고 다그치는 것은 이제 그만하자. 이들이 직면한 사회구조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먼저가 아닌가. 위정현 중앙대 경영학 교수<ⓒ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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