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발견]겸재의 서른살 眞景

겸재 정선의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 중 '금강내산'

정선(1676~1759)은 가난한 양반가에서 태어나 14세 때 아버지(정시익)를 여의고 생계를 위해 그림쟁이의 길을 택했다. 중인들이 가는 궁궐의 도화서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양반화인(畵人)으로 '창업'을 했다. 그는 김수항의 아들 여섯(6창이라 불렸다. 창집ㆍ창협ㆍ창흡ㆍ창업ㆍ창즙ㆍ창립)을 비롯한 신흥 안동 김씨들의 감식안(鑑識眼)에 들면서 당시 화단(畵壇)에 두각을 드러냈다.그가 전성기를 맞는 것은 3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다. 두 차례의 금강산행은 그의 안목과 성가(聲價)를 함께 높였다. 35세(1712년) 때 1차 여행은 '신묘년 풍악도첩' 13폭을 낳았고, 37세 때 2차 여행은 '해악전신첩'을 낳았다. 이 해악전신첩을 김창업이 청나라 연경으로 들고가 그곳의 화가들에게 품평을 받았는데, "공재 윤두서(당시 최고 화가)보다 뛰어나다"는 찬사가 돌아왔다. 이 소리에 윤두서는 굴욕감을 느끼고 낙향을 하기까지 했다는 얘기도 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정선의 그림 한 폭을 갖는 것이 최고 소원이었다고 한다. 공급보다 수요가 넘치니 그림값이 비쌌다. 한양의 좋은 집 한 채 값이라니 요즘으로 치면 한 점에 5억원쯤 될까.정선이 진경산수(眞景山水)의 묘를 얻은 것은 중국의 화본(畵本)을 바탕으로 한 관념산수가 지닌 정신적 성취를 잃지 않되 조선의 실경(實景)을 실제로 접한 뒤 생생한 생동감과 고유함을 찾아내 화폭에 담은 데 있었다. 당시 영조대의 실학적 기풍이 태동하던 시절에 이런 혁신적인 그림은 지식인들의 심장을 뛰게 했다. 영조는 세자 때 정선에게 그림을 배운 군주였다. 왕이 돼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항상 '겸재'라 부를 만큼 귀하게 모셨다.많은 이들은 겸재의 금강산도를 바라보며 찬탄한 뒤 그의 전모를 보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30대 이후에도 겸재는 예술적인 변용과 진화를 거듭했다. 그는 40대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영남지역의 관리로 나아간다. 1721년(46세)부터 1726년(51세)까지 5년간 화양(경북 경산) 현감으로 있었고, 이후 1733년(58세)부터 1735년(60세)까지 2년여 동안 청하(경북 포항) 현감으로 근무한다. 여기에는 그의 각별한 지원자인 영조의 배려가 있었다. 조선을 대표할 만한 산수 1호가 금강산이라면 2호는 유학기풍의 정신적 뼈대를 이룬 영남일대가 아니겠느냐는 판단이었을지도 모른다.화양현감 시절에 낳은 '영남첩'은 정선이 이룬 빼어난 화업(畵業)의 일대 성취였다. 영남첩의 마지막 화첩(합천 해인사와 울진 성류굴 사생여행을 한 뒤 그린 그림)은 청하 현감으로 왔을 때 완성됐을 만큼, 그로서도 완숙기의 혼을 기울인 노작이었다. (다음 주 금요일 계속)빈섬 이상국(편집부장ㆍ시인)<ⓒ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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