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직장생활 후 처음으로 가을 휴가를 1주일 냈다. 바쁘다는 핑계로 1주일에 한두 번 겨우 보던 아이와 오롯이 1주일을 보내기로 하고 제주도로 떠났다. 그냥 걷기만 해도 근심이 사라진다는 올레길을 걷다 보면 '뭐가 좋아도 좋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은 팬션에 짐을 풀면서 깨졌다. 무려 20길이 넘게 나 있다는데 1주일이나 시간이 있으니 절반 정도는 걷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피곤하다는 아들을 닥달해 짐을 풀자마자 올레길로 향했다. 처음 만난 코스는 17길이었다. 뭐가 그리 좋을까 하는 생각에 걸으면서도 눈은 색다른 비경을 찾느라 바빴다. 중간에 해찰을 하는 아이를 재촉해 가급적 많이 걸으려 했다. 서귀포 쪽 대형 목장으로 난 길을 걸을 땐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보다 해 떨어지는 속도가 빨랐다. 그런데 몇백 미터만 더 가면 새로운 길이 시작되니 그 길에 발자국이라도 남기고 싶었다. 어두워지니 그만 돌아가자는 아들을 끌고 기어이 새 길에 발자국을 찍었다. 그렇게 1주일간 발이라도 찍어 본 길이 아홉인지, 열인지 됐다. 먹고 자는 시간 외에는 둘이서 걷기만 하는데도 부자 간의 간격은 좁혀지지 않은 듯했다. 아버지는 따라오지 못하는 아들이 답답했고 아들은 자기의 속도에 맞춰주지 않는 아버지가 야속했다. "많이 바라는 것 아니잖아. 이 정도는 해줘야지 않겠니?" "…."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내일이면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 날 제주도 사는 지인과 올레길 중간에서 만나 점심을 먹었다. "아빠랑 좋은데 많이 다녔니?" 머뭇거리는 아들 대신 답했다. "10길 가까이 걸은 것 같아요." "뭔 극기훈련 왔냐?"는 지인의 질책에 아차 싶었다. 뭘 얻겠다고 아들과 제주도로 온 것일까. 내려놓고, 아들과 눈높이를 맞추겠다는 건 말뿐이었던 셈이다.올레길의 인기에 전국 어디를 가나 '~길' 천지다. 경치가 좋다 하면 어김없이 '~길'이란 이름으로 관광 상품화돼 있다. 동해안 어느 식당 근처에서 우연히 '~길'의 종점을 발견했다. 그곳엔 인증 '스템프'가 있었다. 지난해 올레길을 걷던 당시 1길과 21길 사이에 있던 인증 스탬프가 떠올랐다. 내려놓자고 간 길에서까지 '인증'을 받아야 마음이 놓이는 현대인을 위한 작은 배려가 아니라면 인증 스템프 자리는 없애도 좋지 않을까. 전필수 증권부장 philsu@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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