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포럼]'위험사회'와 메르스 공포

중동호흡기증후군(MERSㆍ메르스) 공포에 떨고 있는 2015년 한국 사회를 가장 잘 규정한 논의 중 하나가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주장한 '위험사회'가 아닐까 싶다. 출간된 지 30년이 지난 책이지만 '위험사회'에서 묘사한 현대사회의 모습은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과 놀라우리만큼 닮아 있다. 부를 추구하고 불평등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던 계급사회와는 달리 위험사회는 위험과 이에 따른 불안을 극복하고 안전을 추구하는 위험이 중심이 되고 안전이 물과 같은 공적 소비재가 된 사회를 말한다. 울리히 벡은 현대사회 위험의 특징으로 지역적 제한성이 없다는 점과 사회계층에 관계없이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중동에서 시작된 메르스가 아시아 대륙의 반대쪽 끝에 위치한 우리나라를 위협하고 있고, 행정구역을 넘나드는 감염자의 전파는 현대사회 위험의 글로벌화를 보여준다. 소득수준이 가장 높다는 대치동과 전문가 집단인 의료진조차도 노출된 감염 위협은 '스모그는 민주적'이라는 표현을 빌린 (부정적 의미의) '평등'이라는 현대사회 위험의 또 다른 특징이다. 현대사회의 위험이 근대화 이전 사회의 위험에 비해 특별한 이유는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위험에 대한 의식이 고조되었다는 점이다. 과학의 발전은 질병과 자연재해, 어둠과 추위 같은 공포를 해소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과학적 지식은 또 다른 현대사회의 위험을 탄생시켰다. 측정 가능한 위험과 측정 불가능한 위험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고도로 복잡화된 과학적 지식은 위험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을 어렵게 만들어 새로운 양상의 불안을 유발한다. 이로 인해 위험 분석에 대한 신뢰가 낮아지고 더 많은 정보는 역설적이게도 전문가의 역할 기반을 약화시킨다. 이번 메르스 사태에서도 감염성, 치사율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고, 감염경로에 대해서도 정부 당국과 세계보건기구(WHO)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저명한 과학학술지 '사이언스'는 한국인의 유전자가 메르스에 취약할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해 객관적인 질병의 위험성 판단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동안 과학은 일정 수준 이상의 지식을 갖춘 전문가만의 영역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위험에 대한 객관적 분석의 어려움과 약해진 전문가 역할 기반은 앞으로 위험사회를 대처해 나가는 데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현대의 과학은 과학적 방법론에 근거한 일정한 지식 체계 안에서 전문가들이 세워온 학문적 합리성을 바탕으로 발전해 왔다. 현대의 위험사회에서 학문적 합리성을 완성하기가 힘들어졌다는 점이다. 여기에 대응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전문가가 아닌 일반 시민들의 적극적 개입임을 울리히 벡은 주장한다. 일반 시민들이 세운 기준인 사회적 합리성이 불완전한 학문적 합리성을 승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사회적 합리성만으로 과학을 승인할 수는 없다. 터무니없는 지식을 배제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개인들이 필요하고, 잘 정리된 학문적 합리성이 사회적 합리성에 판단의 기준을 제공해야 한다. 이런 전제 조건이 만족되지 못하면 전문가 사이의 이견에 의한 혼란보다 훨씬 더 큰 혼란을 야기할 것이다. 학문적 합리성과 사회적 합리성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사회의 첫걸음으로 사회 각 주체 간의 커뮤니케이션에 있다. 스위스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 리스크 거버넌스 기구(International Risk Governance Council)에서는 전 지구적 위험에 대비하기 위한 리스크 거버넌스 프레임워크를 제안하고 있다. 전문가의 영역으로만 여겨지던 과학기술과 과학기술 관련 정책 결정에 있어 일반 시민들을 더 이상 '통치의 대상'이 아닌 '협치의 파트너'로 생각하는 것이 위험사회를 대처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진영현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전략연구팀장<ⓒ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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