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명견 동덕여대 명예교수
미국면화협회가 지난 12일 조선호텔에서 제 14회 '코튼데이 2015' 행사를 개최했다. 미국 면(綿)의 우수성을 알리고 면제품의 수요 촉진을 위해 해마다 이 행사를 연다. 세계 면생산 3위인 미국의 글로벌 마케팅 행사다. 새삼 면섬유의 가치를 재확인 하면서, 그 가치 때문에 빚어진 세계 역사의 소용돌이를 떠올리게 된다. 면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다. 기원전 3000년경 인더스강 유역과 이집트 나일강가에서 목화를 재배하고 면직물을 입었다는 자료가 있다. 유럽에 면직물이 전해진 것은 A.D.800년경 아랍 상인들에 의해서지만 본격적인 전파는 1498년 인도항로가 열리면서부터였다. 신항로 개척이후 인도의 면직물은 서유럽에 면직물 돌풍을 일으켰다. 인도는 일찍이 빛나는 문화와 경제력을 가진 나라로 그 중심에 면직물 산업이 있었다. A.D.1000년경부터 세계적 면직물 수출국이었다. 1600년대 초, 인도에 눈을 돌린 영국은 그 나라의 면직물에 감탄을 한다. 지금까지 입던 양모와 달리 가볍고 따뜻하며 질기고 세탁이 쉽고 다양한 색채에 다채로운 무늬까지 있어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면직물은 영국뿐 아니라 전 유럽에 흑사병처럼 번져 유럽인의 외피를 완전히 바꿔버렸다. 울상이 된 양모 기술자들이 면직물 옷을 입은 행인들의 옷을 찢고 폭동까지 일으키고 영국의회를 압박해 수입을 금하기까지 했다. 허나 면직물에 대한 열망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때문에 인도는 인도면에 눈독 들인 유럽 여러 나라들의 각축장이 됐다. 결국 인도는 이 다툼에서 이긴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도 했다. 영국은 그 여세를 산업혁명으로 이어갔다. 1765년 와트가 발명한 증기기관이 면방적기와 직조기에 연결되면서 면직공업의 급성장은 물론 산업혁명에 불을 붙였다. 영국의 공장에서 대량생산 된 면직물은 다시 인도로 역수출 됐다. 면의 종주국 인도가 수입국으로 전락하는 아이러니가 빚어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면사를 수입해 면직물을 제직했던 것으로 추정되나, 고려말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숨겨 들여오면서 새로운 계기를 맞는다. 조선조 세종대왕의 장려로 면직물 생산이 더욱 늘어 이때부터 주된 의복재료가 됐다. 더불어 조세물품과 외국과의 주교역품으로서 더욱 중요시 됐으며,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에 면업을 전파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 중기부터 면포에 대한 조정의 조세수탈로 생산의욕이 꺾이게 된다. 세금수탈에만 열을 올렸을 뿐 품질 향상이나 기술개발 노력은 전혀 없었다. 투박한 광목만 만들어내야 했다. 질 좋은 수입 외국산 면포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뒤늦게 조선에서 면직기술을 배워갔던 일본은 일찍 서구문명을 받아들여 면직물을 대량생산했다. 조선에서 토산면화를 싼값에 가져가 비싼 면직물로 만들어 되팔았다. 조선을 식민지화 한 이후에는 부산에 공장을 세워 면포를 생산해서 이 나라 시장에 팔았다. 이로써 조선은 일본 면방직공업의 원료생산지, 가공기지 및 소비지로 전락했다. 역사는 면직물로 산업혁명을 성공시킨 영국, 소중한 자기 것도 지키지 못한 인도, 그리고 간특한 일본에 넘어간 조선을 보고 깨우치고 배우라고 소리친다. 송명견 동덕여대 명예교수<ⓒ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산업부 김현정 기자 alphag@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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