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상열의 '징비록'
[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
징비록
'징비록', 우리는 국사 시간에 '시험에 나오니까 밑줄 쫘악'하는 정도로 치부한다. 그 징비록을 오늘의 역사가 다시 소환하고 있다. 소환장에 날인한 주체는 위기앞에서도 정쟁을 일삼고, 분열을 획책하며, '세월호' 같은 참사가 되풀이하는 현실이다. 실상 우리가 겪은 위기의 시대는 언제나 임진왜란 속 조선과 한치의 오차도 없이 닮아 있다. 세월호 사태 하나를 처리해 나가는 모습이 그 사례다.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회고록이자 모범으로 꼽힌다. 회고록이 자기 미화와 변호에 빠질 때 후대에게 엄청난 부담을 준다. 실례로 이명박 전대통령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이 출간된 지 며칠도 안 돼 당장 민족이 반목하고, 정치권이 갈등하고, 국민이 분열, 정쟁의 도구로 변질된데서도 잘 알 수 있다. 회고록의 가장 큰 원칙은 자신의 기록을 통해 시대와 소통하고 후대의 풍요로운 삶을 도와줘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징비록은 회고록이 갖춰야할 덕목을 두루 보여준다. 서애는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고 비옥한 강토를 피폐하게 만든 전화를 회고하면서 다시는 임진왜란과 같은 전란을 겪지 않도록 지난날 조정의 여러 실책을 반성하고 지난 일을 경계하고 뒷날의 근심거리를 삼가게 한다'는 말로 회고록의 의미를 정리하고 있다. 현재 국보 제132호로 지정된 '징비록'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04년(선조 37년) 저술된 다음 1647년(인조 25년)16권7책으로 간행됐다. 1695년 일본 에도막부는 징비록을 입수해 국책사업으로 번역, 출간한 다음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가장 중요한 조선 연구의 자료로 삼는다. 일본 사학자들은 예외 없이 징비록을 조선 연구의 기반으로 한다. 서애는 임진왜란이 끝남과 동시에 실각, 귀향해 징비록을 집필했다. 1607년 서애가 사망하자 선조는 이순신에게 했던 것처럼 시호조차 내려주지 않았고 겨우 직첩을 돌려주고 삭탈관직의 불명예를 일부 회복시켜주는 정도로 외면하고 무시했다. 징비록은 시대를 짊어진 자의 혹독하고도 참혹한 반성문이다. 또한 위기의 시대에 스스로를 전쟁 한복판에 밀어넣고 국가의 족속을 위해 헌신한 이의 기록이기도 하다. 징비록은 일반인들이 접하기 어려운 회고록으로 오늘날 소환해야하는 이유는 임진왜란과 같은 참사가 여전히 벌어지고 있어서다. 서애는 전쟁에 신음하는 백성을 보며 정치인이자 학자로, 한 인간으로 진흙탕 속 정쟁이 취한 조정을 대신해 자신을 기꺼이 버린 인물이다. 한 손으로는 당쟁의 참화에 희생될 뻔한 이순신같은 영웅들을 보호하고, 한 손으로는 물자와 군사를 모으고 , 머리로는 명과의 외교, 전략을 수립하고 다리로는 전쟁터와 민생현장을 누비며 온 몸을 던져 전쟁에 맞섰다. 최전방 바다위에서 이순신이 피 흘리는 동안 서애는 '영의정'이라는 행정수반으로서 최후방을 담당했다. 서애는 징비록을 통해 전쟁 이전부터 전쟁의 모든 과정을 상세히 기록, 후세에 경계를 삼는 것은 물론 조선왕조실록에 담긴 전쟁의 역사를 철저히 복원한다. 특히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더불어 임진왜란을 교차 검증할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사료다. 징비록은 정치와 정략이 전쟁을 부르고, 전쟁으로 인한 새로운 흐름과 전쟁 참여자들의 더럽고도 음습한 인간관계, 정쟁, 그 가운데서 끝내 이겨내야 하는 책임자로서의 처절한 삶이 녹아 있다. 또한 전쟁의 원인과 책임을 정확히 진단하고, 지옥을 살아온 자신에게는 혹독한 비판과 반성을 담고 있다. 비판에는 어느 한군데 성역을 두지 않고 있으면서도 원균, 김성일, 토요토미 히데요시, 선조 등 당대의 인물이 '왜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그들의 입장에서 상세하게 다룬다. 서애의 사망 이후 조선은 징비록의 교훈을 새기지 못 하고 병자호란, 일제 침략 등으로 이어지면서 멸망의 비운을 맞았다. 이에 후대들은 늘상 왜 조선은 전쟁을 치루고도 위기와 비극을 반복하는 지 의문에 휩싸인다. 저술가 '배상열'이 집필한 징비록 -비열한 역사와의 결별'은 진정한 반성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한양을 사수하겠다던 선조, 서울을 지키라던 이승만, 먼저 배에서 도주한 세월호 선장 등 위기의 과정에서 놀랍도록 재현되는 인물들이 왜 나타나는지도 확연히 일러준다.그간 서애의 원작은 번역본을 접해도 지금의 시각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많았다. 또한 통렬한 반성을 제대로 소화하기 어려웠다. 저자는 "원작에서 불필요한 부분과 잘못된 부분을 제거하고 행간의 숨은 뜻을 발굴하고자 했다"며 "서애의 시대가 바로 우리가 겪어온 현대사와 놀랍도록 일치한다"고 강조한다. <배상열 지음/추수밭 출간/값 1만6000원> 이규성 기자 peace@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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