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표[사진=김현민 기자]
2015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이 네 경기만을 남겨놓았다. 국가대표 은퇴를 앞둔 차두리의 탱크 같은 드리블, 차두리와 띠 동갑이자 차범근의 레버쿠젠 후배인 손흥민의 폭발적인 슈팅 등이 축구 팬이 아닌 이들까지 TV 앞으로 불러 모으고 있다. 녹아웃 스테이지의 첫 관문이었던 지난 22일 우즈베키스탄과 경기에서는 이 대회 들어 처음으로 방송사 두 곳이 함께 중계해 또 다른 화제를 낳았다. 시청률 조사회사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이날 KBS는 SBS의 5.4%에 4.4% 포인트나 앞선 시청률 9.8%를 기록했다. 시청률의 사각지대라고 할 수 있는 평일 오후에 경기가 시작됐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두 자릿수에 가까운 KBS의 시청률은 꽤 주목할 만하다. 방송사 사이의 시청률 경쟁은 둘째 치고 이렇게 높은 시청률이 나온 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을 것이다. 일단 한국이 조별리그에서 개최국 호주를 1-0으로 잡으면서 3전 전승으로 1라운드를 통과하자 이 대회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던 골수팬들이 마음을 바꿨다. 손흥민, 김진수, 남태희 등 20대 초반 또래들의 활약상에 여성들의 관심도 높아졌다. 8강에서 일본과 이란이 탈락했지만 두 나라를 비롯해 AFC의 ‘빅 4’인 한국과 호주가 모두 조별리그에서 살아남았고, 이들끼리 맞붙지 않은 8강 대진표 역시 팬들의 관심을 끌어올린 듯 보인다. 요인은 하나 더 있다. 인기 해설자의 등장이다. 일명 ‘문어 영표’로 불리는 이영표는 지난해 브라질월드컵과 인천아시아경기대회에서 일약 스타 해설자로 떠올랐다. 경기인 출신만이 갖고 있는 현장 경험에 날카로운 분석과 뛰어난 말솜씨, 캐스터와 호흡 그리고 표준어 사용까지 해설자로서 갖춰야 할 모든 것을 뽐냈다. 경기인 출신 해설자가 바람직하긴 하지만 순발력이 떨어져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가 하면 탁한 목소리로 시청자나 청취자에게 거부감을 주는 사례도 있다. 또 예전에는 말이 많은 캐스터를 만나서 중계방송 내내 ‘네, 네’만 하다가 마이크를 놓는 일도 있었다. 갖춰야 할 또는 없어야 할, 이런 모든 조건을 이루기는 매우 어렵다. 하지만 이영표를 비롯한 몇몇 해설자들은 한두 가지 약점이 있어도 이를 극복하고 명품 해설자로 스포츠팬들의 사랑을 받았거나, 받고 있다.
왼쪽부터 허구연, 구본능 KBO 총재, 하일성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했을 때 이호헌(작고), 하일성(이상 KBS), 허구연(MBC) 해설위원도 선수들 못잖게 주목을 받았다. 이호헌은 한국실업야구연맹 사무국장 시절 미국과 일본보다 더 세세한 우리나라만의 기록 방법을 정립하는 등 아마추어 야구 해설을 포함한 오랜 기간의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정감 있는 해설을 했다. 하일성은 고등학교 체육교사를 하다가 1970년대 후반 방송계 지인의 권유로 TBC(오늘날 KBS2) 마이크를 잡은 뒤 청산유수와 같은 말솜씨로 시청자와 청취자의 귀에 쏙쏙 들어오는 해설을 했다. 실업야구 한일은행 시절 다리를 크게 다쳐 선수 생활을 일찍 접은 허구연은 대기업에서 샐러리맨으로 일하다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해설자의 길로 들어섰다. 포볼과 데드볼, 리터치 같은 일본식 영어 야구용어를 베이스 온 볼스(요즘은 볼넷), 히트 바이 피치드 볼(요즘은 몸에 맞은 공), 태그업으로 바꾸며 당시 기준으로 신세대 팬들의 호응을 얻었다. 이들 가운데 이호헌은 한국야구위원회 사무차장 직에 전념하기 위해 일찌감치 마이크를 놓았고, 1983년부터 오랜 기간 ‘하-허’ 시대가 이어지게 된다. 이호헌은 마산상고-서울대 상대, 하일성은 성동고-경희대, 허구연은 경남고-고려대 출신의 경기인들이다. 운동선수 출신이면 뭔가 한두 가지 단점이 있을 것 같은데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프로야구가 인기 스포츠로 자리를 잡는 데 한몫을 했다. 축구, 야구 외 종목에도 인기 해설자들이 있다. 농구의 경우 김영기 한국농구연맹 총재가 대표적이다. 김 총재는 배재고-고려대를 거쳐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국가대표를 지내며 1956년 멜버른올림픽, 1964년 도쿄올림픽 등에 출전했다. 그는 화려한 드리블로 대표되는 뛰어난 개인기로 농구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김 총재는 1965년 은퇴 뒤 직장생활 틈틈이 박정희장군배동남아시아여자농구대회, NBA(미국프로농구) 등 각종 경기의 해설을 맡아 선수 시절 못잖은 인기를 누렸다. 글쓴이는 밀워키 벅스와 같은 구단 이름이나 빌 러셀(1956년 멜버른), 오스카 로버트슨(1960년 로마) 등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 NBA 스타들의 이름을 김 총재의 해설로 알게 됐다.
김영기 KBL 총재[사진=김현민 기자]
김 총재는 각종 기록을 근거로 특정 경기의 승패는 물론 예상 점수까지 내놓아 농구팬들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1967년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는 이 같은 예상이 족집게처럼 들어맞아 농구팬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농구판의 이영표’가 40여 년 전에도 있었던 것이다. 한국 남자농구 슈터 계보에서 김 총재의 뒤를 잇는 신동파 전 대한농구협회 부회장은 해설할 때 자유투가 선수의 손을 떠나는 순간 “아, 네. 성공했네요”라고 말하곤 했다. 어찌 보면 성급하기까지 했던 이 예상은 틀린 적이 없었다. 3점슛이 없던 시절 경기당 30~40점을 밥 먹듯이 넣었던 신 전 부회장이기에 가능한 예상이었고 경기인 출신만이 할 수 있는 해설이었다. 글쓴이의 경험에 따르면 스포츠팬으로 입문할 때 길잡이는 해설자다. 신명철 스포츠 칼럼니스트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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