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재 사회문화부장
여성으로서 7대륙 최고봉에 올랐으며 북극과 남극점을 스키를 타고 밟았던 앨리슨 레빈은 '내가 정상에서 본 것을 당신도 볼 수 있다면'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극지 모험담을 펼쳐내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그런데 그의 얘기를 읽으면서 그녀가 경영대학원(MBA)을 나와 월스트리트에서도 일을 했다는 부분이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그 대목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남극과 월가, 둘 중 어느 쪽이 더 위험한 곳일까.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기상, 한 번 길을 잃어버리면 생명(물리적 생명이든, 사회적 생명이든)이 위협받는 환경, 무시무시한 적들(자연이든, 인간이든) 속에서 몸과 마음을 조여 오는 압박감. 위험의 유형이나 성격은 다르지만 월가도 히말라야만큼이나 위험한 곳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아가서 이 여성에겐 어쩌면 월가보다 히말라야가 오히려 더 편안한 곳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월가에서 빠져나와 '안전지대'인 히말라야로 피신해 간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 든다. 그렇잖은가. 극지는 단지 히말라야에만, 극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잖은가. 우리의 삶 자체가 실은 극한체험의 일부가 아니겠는가. 영화 '국제시장'이 보여주는 한 진실도 바로 그것이었다. 해방 후 지난 70년간 한국인들의 삶은 극한 조건을 견디며 헤쳐온 생존기에 다름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주인공의 삶은, 아니 많은 한국인들의 삶은 거의 매일매일, 매 순간순간이 '눈보라 휘날리는 바람찬' 날의 흥남부두 바로 그날의 연속이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온 해방 후 70년, 그렇게 앞만 보고 뛰어온 우리의 70년이었다. 그리고 새해 우리는 이제 100년을 향해 새로운 출발점에 선 기분이 든다. 앞으로 30년을 또 뛰어보자, 다시 달려보자, 우리는 그렇게 새해부터 각오를 다지고 있다. 그런데 지난 70년간 끝없이 뛰어온 우리가 또 얼마나 힘껏 달릴 수 있을까. 엘리슨은 에베레스트에 오르려면 고소 적응을 위해 올라갔다가 도로 내려오는 것을 반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올라가려면 일단 도로 내려가야 한다. 내려가는 것은 물리적으로는 정상에서 멀어지지만 사실 목표에 한 발자국씩 전진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상으로 가기 위해서는 때로는 후퇴하는 것도 진보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다시 달리려면, 다시 진보하려면 일단 멈춰서고, 일단 내려가야 한다. 내려감으로써 오를 수 있고, 멈춤으로써 나아갈 수 있다. 이명재 사회문화부장 promes@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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