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틸리케의 손을 주목하라

아시안컵 골키퍼 후보는 넷, 엔트리는 셋…이범영은 제 3의 옵션으로 분리, 제주훈련 후 상황 달라져 '누구나 주전될 수 있다'

축구대표팀 골키퍼 정성룡-김진현-김승규[사진=대한축구협회 제공]

[아시아경제 김흥순 기자] 지금까지는 이랬다. "정성룡(29·수원)과 김진현(27·세레소 오사카), 김승규(24·울산) 중 한 사람이 '넘버 1'이 되어 대표 팀의 골문을 지킨다. 이범영(25·부산)은 승부차기에 대비한 후보 골키퍼다."그런데 울리 슈틸리케 감독(60·독일)의 얼굴을 봐서는 이런 통념이 맞을 것 같지 않다. 그는 조용하게 '새 판'을 짜고 있다. 내년 1월에 열리는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에서 누가 주전 수문장이 될지 예측할 수 없다. 주전은 고사하고 대표팀 명단의 골키퍼 몫 세 자리를 누가 채울지도 알기 어렵다. 그리고 이 상황은 이범영에게도 마침내 주전으로 도약할 기회가 왔음을 의미한다. 슈틸리케 감독은 제주 서귀포 전지훈련(15~21일)에 대표선수 스물여덟 명을 선발하면서 골키퍼만 네 명을 불렀다. 정성룡과 김진현, 이범영, 김승규에다 부상 등 변수를 감안해 대기명단에 권순태(30·전북)와 신화용(31·포항)까지 이름을 올렸다. 국가대표로 쓸 만한 골키퍼는 모두 테이블에 올려놓고 검증해 보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범영은 늘 '넘버 3'이었다. 주전 자리를 다투는 두 골키퍼가 모두 부상이나 퇴장 등으로 출전할 수 없을 때 마지못해 빼드는 카드였다. 그러나 슈틸리케 감독이 지켜보는 가운데 열기를 더해가는 제주 전지훈련장에는 묘한 변화의 기류가 흐른다. 이범영도 눈치를 챘다. 그는 "주전과 비 주전의 구분이 모호해졌다. 누구라도 주전 골키퍼가 될 수 있다는 경쟁심이 생겼다"고 했다.

울리 슈틸리케 축구대표팀 감독[사진=대한축구협회 제공]

이범영이 국가대표로 골문을 지킨 가장 최근 경기는 지난 9월 8일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우루과이와의 평가전이었다. 대표팀이 0-1로 패했으나 이범영의 활약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실점과 다름없는 위기에서 선방하는 장면이 많이 나와 승부차기 스페셜리스트라는 이미지를 상당 부분 씻어냈다. 이 경기는 또한 슈틸리케 감독이 대표 팀을 맡은 뒤 두 번째 열린 국가대표 친선경기였다. 슈틸리케 감독이 당시에 머리에 입력한 인상은 앞으로도 영향을 줄 것이다.슈틸리케 감독 체제에서는 '기정사실'이 없다. 그는 계속해서 '판'을 흔들고 있다. 3순위 후보였던 김진현이 선발 카드로 떠오른 것도 같은 맥락이다. 김진현은 2009년 일본(세레소 오사카)에서 프로에 데뷔해 꾸준하게 선발 자리를 지켰으나 국가대표 경기는 한 차례(2012년 5월 30일 스페인 친선경기)만 뛰었다. 2014 브라질월드컵 최종명단에도 빠졌다. 그러나 슈틸리케 감독 부임이 결정되고 여섯 차례 열린 친선경기에서 세 차례 골문을 지켰다. 그러나 이 사실만으로 경쟁자들보다 우위에 섰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슈틸리케 감독이 그를 집중 관찰했다고 볼 수도 있다.제주에서 훈련하고 있는 골키퍼들의 성향은 제각각이다. 정성룡은 국제대회 출전 경력이 가장 많지만 가장 뛰어난 골키퍼로 공인받지는 못했다. 김승규는 빠른 판단과 순발력으로 실점위기를 넘기는 '슈퍼세이브'가 많다. 슈틸리케 감독도 이범영이 토너먼트 대회에서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하기 십상인 승부차기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축구대표팀 골키퍼 이범영[사진=대한축구협회 제공]

슈틸리케 감독은 미니게임을 번갈아하며 골키퍼 두 명씩 장단점을 비교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사령탑의 눈도장을 받기 위해 몸을 날리고 어려운 공을 막아내며 짧은 시간동안 최대한 자신을 어필하려 한다. 훈련장을 울리는 우렁찬 목소리도 자신의 팀에 포함된 수비수들을 향한 골키퍼들의 외침이 대부분이다. 김진현은 "아직 확실한 주전은 없다. 큰 무대 경험이 없는 내가 가장 뒤처져 있다"고 했다. 정성룡도 "경쟁이 치열하다.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다"고 했다. 독일이 통산 네 번째 월드컵을 제패하는 데 기여한 마누엘 노이어(28·바이에른 뮌헨)는 현대 축구에서 골키퍼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를 확인했다. 실점 위기를 이겨내는 것은 물론, 넓은 활동반경으로 수비수의 빈자리도 메웠다. 골키퍼들에게 빠른 판단과 스피드가 요구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60년 이후 55년 만에 아시안컵 우승을 노리는 우리 대표팀도 예외는 아니다. 한준희 KBS 해설위원(44)은 "수비수를 전진시켜 경기의 주도권을 잡는 경기운영을 하려면 수비수가 비운 뒷공간을 골키퍼가 책임져야 한다. 빠른 판단과 움직임, 공을 다루는 기술을 갖춰야 한다"고 했다. 김흥순 기자 sport@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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