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성엣장 부부에 바치는 헌사

김동선 기획취재팀장

[아시아경제 김동선 기자]아차 하는 순간이었다. 2만볼트(V)의 전기가 온몸을 관통했다. 짜릿한 느낌도 없었다. 그저 죽는구나 싶었다. 아니 그런 생각이 들 틈이나 있었을까. 두 팔은 그 자리에서 타버렸다. 발가락 두 개도 터졌다. 감전된 흔적은 도려내야 했다. 그렇게 두 팔을 잃었다. 중환자실에서만 27일. 의료진들은 말을 흐렸다. 말끝마다 '언제 죽을지 모르니'라고 했다. 희망은 어디에도 없었다. 병원에 꼼짝없이 누워 있던 게 1년 반. 찰나의 실수라기엔 상처가 너무 컸다.그때 나이 29살. 혈기 왕성한 젊은이에겐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악몽이라도 좋으니 그저 꿈이길. 그러나 현실은 절망 자체였다. 이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갓 태어난 아들놈은 어떻게 하지. 제 손으로 숟가락도 못 들 처지라니. 그렇게 인생도 잘리고 끝나는 줄 알았다.그로부터 서른 해. 어느덧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 팔이 있던 세월보다 팔 없이 더 살았다. 살아냈다는 표현이 더 나을지 모른다. 다 잃을 줄 알았던 인생은 되레 충만해졌다. 30년간 손발이 되어준 건 아내. 그저 고마울 뿐이다. 표현할 방법이 없다. 표현한다 해도 부족하다. 그사이 전기기술자에서 화가로 직업도 바뀌었다.석창우(59). 사람들은 그를 의수화가라 부른다. '양팔 없는 화가'로 더 유명하다. 수묵크로키. 그의 전매특허다. 붓으로 크로키라니. 그것도 '팔 없는 화가'라면서. 그럼에도 여느 작가들보다 작품활동이 왕성하다. 그간 개최한 개인전만 37회. 쇠갈고리로 붙잡은 붓 끝에선 힘이 넘친다. 사이클ㆍ축구 선수, 농악패의 역동적 장면이 순식간에 피어난다. 수묵크로키 퍼포먼스는 압권이다. 부르는 곳도 많아졌다. 해외에서도 유명인사가 된 지 오래다. 올 초 소치 장애인동계올림픽 폐회식을 장식하기도 했다.그의 별칭은 성엣장. 물 위를 떠내려가는 얼음조각을 뜻한다. 유빙(流氷)의 순우리말이다. 스스로 지은 호다. 지극한 고독에 빠진 처지를 빗댄 것일까. 아니다. 서서히 녹아 어느 순간 물과 하나되는 게 좋아서란다. 그래서일까. 그는 블로그며 페이스북이며 소통하길 좋아한다. 팔이 없는데 어떻게? 그는 일명 독수리 타법의 대가다. 쇠갈고리로 누르는 자판은 여지없다. 후천적으로 진화(?)한 신체 덕분일 게다.지난달 29일. 사고를 당한 지 꼭 30년이 되는 날. 오랜만에 만난 날이 우연찮게 그날이었다. 서울 대방동. 화실을 겸하고 있는 자택을 찾았다. 안부인과 함께 반갑게 맞아주는 성엣장. 부부는 번잡한 일과를 보내고 막 들어선 참이라고 했다. 치매가 심해진 미수(米壽)의 부친 뒷바라지에 온종일 분주했다고. 그래서 매년 '생일'처럼 챙기던 30년 전 '그날'도 까먹었단다.자리를 옮긴 저녁 식사 자리. 이야기는 자연스레 30년 전 그날로 이어졌다. 사고 당일의 아찔한 기억. 따갑던 주변의 시선들. 붓을 놀려 쌓인 연습지가 마대자루에 가득 차고도 넘쳤던 인고의 시간을. 막막한 생계까지 책임져야 했던 안주인의 삶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래도 부부는 "고마운 삶이었다"고 돌이켰다. 터진 일은 터진 일이고 어떻게든 수습하는 게 먼저였다고. 다행히 아들 딸은 잘 커줬다. 최근 1년 새 나란히 결혼도 시켜 마음의 짐을 덜었다. 이젠 웃으며 회고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메뉴로 나온 아귀찜을 스마트폰 카메라에 담는 성엣장. 젊은이들이 즐겨하는 페이스북 '먹방' 포스팅. 이를 보고 '아직 철이 덜 들었다'는 아내의 타박. 그러자 쇠갈고리 양 팔을 들어올리며 농을 치는 남편. "난 진작 철 들었다"고. 서로를 '아줌마' '아저씨'라 애칭하는 부부는 그렇게 닮아가고 있었다.일찍이 나는 보았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이를. 그날 나는 알았다. 귀부인(貴夫人)도 그 주인공이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느꼈다. 차가운 의수에서 전해오는 그 따뜻한 온기를. 아울러 그 온기는 아내가 지펴주고 있음을. 다시금 나는 깨달았다. 역시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것을.김동선 기획취재팀장 matthew@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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