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AG]맏형 정지현, 韓 레슬링에 희망을 쐈다

인천아시안게임 그레코로만형 남자 71㎏급 금메달

오른쪽부터 정지현, 아들 우현, 아내 정지연, 큰딸 서현[사진=이종길 기자]

"아내, 아이와 약속 지켰다"...만신창이 얼굴에 눈물 글썽[인천=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시커멓게 멍든 눈. 입술은 파랗게 부르텄고 얼굴과 목은 손톱에 이리저리 베여 만신창이가 됐다. 하지만 불끈 쥔 두 손은 체육관의 천장을 향했다. “너무 행복해서 하늘을 뚫고 날아갈 것 같아요.” 2004년 아테네올림픽 이후 10년만이었다. 레슬링대표팀의 정지현(31·울산남구청)이 메이저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땄다. 인천 도원체육관에서 30일 열린 인천아시안게임 레슬링 남자 그레코로만형 71㎏급 결승 경기에서 딜쇼드존 투르디예프(23·우즈베키스탄)를 테크니컬 폴로 물리쳤다. 경기 시작 34초 만에 상대를 빠르게 낚아채는 엉치걸이로 4점을 얻었다. 49초에 업어 메치기로 한 점을 추가한 정지현은 1분22초에 다시 한 번 업어 메치기로 상대를 매트에 꽂아 4점을 뽑았다. 투르디예프의 등이 매트에 닿자마자 정지현은 벌떡 일어나 포효했다. 레슬링은 한 피리어드에서 기술점수가 6점 이상 나거나 3점짜리 기술이 2회 성공했을 때, 혹은 큰 기술에 성공해 5점을 얻을 경우 테크니컬 폴을 적용한다. 정지현은 바로 안한봉(46) 대표팀 감독의 품에 안겨 눈물을 글썽였다. 건네받은 태극기를 두 손으로 흔들고 매트 위를 누비며 한국 레슬링의 부활을 알렸다.이란의 벽 깼다한국 남자 레슬링은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노 골드’로 침묵했다. 이란의 벽에 가로막혔다. 2010년 광저우대회까지 역대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쉰여덟 개를 거머쥔 레슬링 강국이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도 금메달 세 개를 땄다. 이번 대회에서도 30일까지 가장 많은 여섯 개를 챙겼다. 이날 그레코로만형 98㎏급 금메달을 차지한 알리야리페이자바디 마흐디(25·이란)는 “레슬링이 ‘국기’에 가깝게 숭상돼 좋은 선수들이 많이 배출된다. 선수들에 대한 지원도 든든하다”고 했다. 하지만 자유형 61㎏급에서 동메달을 딴 이승철은 “전반적인 실력에서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태릉선수촌에서 실전 대비 훈련 중인 정지현[사진=아시아경제 DB]

‘맏형’ 정지현이 이를 증명했다. 그는 준결승에서 이전부터 경계대상 1호로 꼽아온 사이드 무라드 압드발리(25)와 부딪혔다. 2010년 광저우대회 66㎏급 금메달리스트로 이번 대회에서 71㎏급으로 체급을 올렸다. 정지현은 초반 기술 점수에서 4-0으로 앞섰지만 상대에 넬슨(목 조르기) 공격을 세 번이나 허용, 4-6으로 역전을 당했다. 두 어깨가 매트에 1초 이상 닿으면서 폴로 패할 위기까지 놓였다. 그러나 한국 벤치의 요청에 따른 비디오 판정에서 압드발리가 목을 감싸서 안는 기술은 반칙으로 인정됐다. 극적으로 위기를 벗어난 정지현은 9-6으로 역전승했다. 그는 “심판에게 반칙을 알리고 싶었지만 목을 심하게 졸려 정신이 없었다. 점수를 계속 내줬을 때 정말 지는 줄 알았다”고 했다. 그는 “어떻게든 이겨야 할 상대였기에 무작정 들이댔는데 계속된 충돌에서 내가 더 강했다. 경기 후반 압드발리가 수비적으로 자세를 바꾸는 걸 보고 이겼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했다. 특유 넬슨 공격이 반칙으로 선언된 압드발리는 경기 뒤 심판진에 손가락 욕을 했다. 야다브 크리샨칸트(24·인도)와 동메달 결정경기에서는 보란 듯이 넬슨 공격을 네 번이나 시도했다. 결국 다른 기술을 사용해 3-0 승리를 거두고 동메달을 땄다. 경기 뒤 그는 매트에 쓰러져 7분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레슬링관계자들은 “자신의 기술이 인정을 받지 못해 항의 차원에서 일부러 그런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정지현이 태극기를 들고 금메달 세리머니를 한 뒤 관중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하고 있다.[사진=이종길 기자]

가족의 힘정지현의 아내 정지연(32) 씨는 관중석에서 준결승 경기를 지켜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극적인 역전승을 이뤘지만 계속된 목 조르기 공격에 남편의 얼굴이 만신창이가 됐다. “멀리서 지켜보는데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그런 아빠를 보고 큰딸 서현(3)이와 아들 우현(2)이는 계속 경기장으로 내려가라고 조르더라고요.” 정지현은 그동안 태릉선수촌에서 훈련해 거의 집을 찾지 못했다. 경기 보름여를 앞두고 집에 들렀지만 추억을 만들기에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정지연 씨는 “남편이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오늘 경기를 보면서 애들을 더 열심히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금메달을 목에 건 정지현은 곧장 경기장 복도로 달려가 가족과 재회했다. 그는 “경기 때는 가족이 왔는지 알지 못했다. 시상식대에 올라 얼굴을 봤는데 잘 보이지가 않아 한걸음에 달려왔다”고 했다. 카메라에 둘러싸인 서현이와 우현이는 아빠 곁에 철썩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정지현이 아시안게임선수촌으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기 위해 발길을 돌리려하자 점퍼를 꼭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정지연 씨가 강제로 떼어낸 뒤에는 계속 울음을 터뜨렸다. 정지현은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에게 더 잘해야 할 것 같다.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 여행이라도 다녀와야겠다”고 했다. 그가 고마움을 나타낸 가족은 또 있었다. 큰형 정수현(38) 씨다. 준결승을 힘겹게 마친 동생에게 원기를 되찾으라고 직접 전복죽을 쑤어 먹였다. 정지현은 “평소에도 낙지, 고기 등을 사와 몸보신을 시켜준다. 친형들의 정성이 없었다면 오늘의 영광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태릉선수촌에서 실전 대비 훈련 중인 정지현[사진=아시아경제 DB]

레슬링 부활의 신호탄정지현은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위해 지난 1년여 동안 지옥훈련을 했다. 안한봉 감독이 직접 고안한 100여 가지 프로그램을 거쳤다. 그 핵심은 지친 상태에서 근력과 유산소 운동을 병행해 지구력과 파워를 높이는 것이다. 대표팀 동료인 75㎏급의 김현우는 “적응이 될 만하면 새로운 프로그램을 가져오셔서 꾀를 부릴 수조차 없다. 숨이 넘어갈 것 같아도 계속 해야 한다”며 “생사를 넘나들 수밖에 없다”고 했다. 훈련의 강도는 태릉선수촌에서도 지옥훈련으로 통할 만큼 세다. 선수들은 35~40㎏ 모래주머니를 다리에 차고 개구리 점프로 육상 트랙을 돈 뒤 1초의 휴식도 없이 허들, 사다리 등의 장애물을 넘는다. 엎드린 자세에서 가슴을 앞으로 밀면서 400m 트랙을 한 바퀴 돌면 벽에 몸을 기대고 물구나무서기로 200m를 이동한다. 400m 트랙을 1분 내 주파하고 30㎏의 타이어와 씨름을 하는 등 고된 훈련의 연속이다. 맏형으로서 매일 앞장서서 훈련을 이끈 정지현은 누구보다 고생이 심했다. 체급을 바꾼 것부터가 그에게는 도전이었다. 경기 전 정지현은 “국제대회에서 만난 71㎏급 선수 모두가 나보다 힘이 셌다”며 “파워 차이가 적어도 키가 커서 조금만 방심하면 큰 점수를 내줄 수 있다”고 했다. 그의 키는 165㎝. 반면 준결승에서 만난 압드발리는 170㎝, 결승에서 부딪힌 투르디예프는 178㎝다. 더구나 정지현은 대등한 힘 대결을 위해 평소 체중을 75㎏ 이상으로 유지해야 했다. 나이를 먹으면서 살을 빼는 게 힘들다고 판단해 체급을 올린 정지현은 오히려 이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저녁을 잔뜩 먹어 체중을 72㎏로 올려도 다음날 운동을 마치면 70㎏으로 줄었다. 고칼로리 음료에 단백질 프로틴을 끼니마다 타먹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스피드와 지구력으로 승부수를 띄웠다. 파워 보완도 필요했지만 자신의 강점까지 잃고 싶지 않았다. 결국 체격이 월등한 선수들의 허리 부위를 끊임없이 파고들었고 끝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정지현이 큰딸 서현의 목에 금메달을 걸어주고 있다.[사진=이종길 기자]

안 감독은 “스피드와 지구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며 “특히 끊임없이 공격하면서도 낮은 자세를 유지한 것이 주효했다”고 했다. 심권호(42) 대한레슬링협회 이사는 “악바리 같은 근성으로 이란의 벽을 무너뜨렸다”며 “아끼는 후배가 기어코 금메달을 따내 대견하다”고 했다. 정지현은 “준결승에서 큰 고비를 넘기니 자신감이 생겼다. 누구를 만나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메이저대회에 나오는 선수들의 기량은 종이 한 장 차이”라며 “1일 매트에 나서는 (김)현우, 66㎏급의 (류)한수(26·삼성생명), 130㎏급의 (김)용민(26·인천환경공단)이, 85㎏급의 (이)세열(24·한국조폐공사)이 모두 집중력 싸움을 이겨내고 금빛 물결을 이어갔으면 좋겠다”고 했다.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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