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동여담]보름달은 어찌 저리 휘영청 밝은지

허리 꾸부정한 할머니들이 이른 아침 셔터문을 올리는 동네 병원이 있다. 직원들이 출근하기도 전 노인들은 익숙하게 줄을 서서 어제에 이어 오늘도 아침 인사를 나눈다. 병원장이 노인들과 수다 떠는 것을 좋아해 병원은 언제나 동네 사랑방이다. 아들 놈이 용돈을 얼마 줬네, 며느리가 영양제를 사줬는데 미국서 건너왔네, 자랑이 쉼없이 오간다. 그때마다 주름진 얼굴에는 보름달 미소가 휘영청 밝다.추석을 쇠러 고향 갔다가 큰아들 녀석이 독감에 걸리지 않았다면, 그 바람에 동네 사랑방으로 유명한 목포시 용해동의 차영부가정의학과에 들르지 않았다면, 그리고 노인들 틈에 끼어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면 놓치고 말았을 한가위 풍경이다.그러고 보면 추석 분위기는 그새 많이 변했다. 울긋불긋한 한복 곱게 차려입고 옷고름 매만지던 모습은 실종된지 오래다. 친척들 잔소리에 박멸되지 않으려는 혼기 꽉 찬 미혼남녀나 취업 준비생들은 어디 숨었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성묘 음식은 간소해져 묘 앞에 과일 따위를 조금 놓고 술 한 잔 따르면 그만이다. 종교도 제각각이어서 허리 숙여 절하거나, 고개만 까딱하거나, 민숭민숭 두리번거리거나. 이런 모습을 탓할 일도 아니다. 자식들 삶이 얼마나 팍팍한지는 젯밥 먹는 조상님들도 잘 알고 있다. 반가운 얼굴 건강하게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한 한가위가 아닌가. 한낮 햇살이 빳빳한 십만원권 수표 같은 연휴가 아니던가. 다시 귀경길, 교통체증을 피해보자며 추석날 저녁 늦게 서울로 향했다. 다음 날 해 뜨기 전 도착을 목표로 잠을 쫓느라 껌도 씹고, 오징어도 씹고. 그도저도 안 되면 마음에 안 드는 선배나 말 안 듣는 후배를 씹느라 턱 관절이 고행이다. 13년된 애마는 로시난테처럼 힘겹게 밤길을 헉헉 달린다. 턱은 얼얼하고 졸음은 쏟아지고 13살 로시난테는 연신 추월을 당하는데 보름달은 어찌 저리 휘영청 밝은지. 저 달빛이 묻는다. 추석 풍경이 이리 냉정하게 바뀌는데 다음 세대의 추석은 어떤 모습일까. 짐작건대, 몇시간이고 가다서다를 반복하는 귀성길 몸살은 점차 줄어들 것이고, 여행사는 여름 피서철만큼이나 분주해질 것이고, 시골은 좀 더 황량해질 것이고, 저 목포 동네 병원의 노인들 수다는 잦아들 것이고, 다만 그때도 보름달은 휘영청 밝을 테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피곤한 새벽 귀경길도 견딜만 해지는 게 아닌가. 여독과 노곤함이 스르르 가시는 게 아닌가. '더도 덜도 말고 꼭 한가위만 같아라'는 인사가 더없이 소중해지는 게 아닌가.이정일 산업2부장 jaylee@asiae.co.kr<후소(後笑)><ⓒ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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