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위대한 개츠비’ 캐릭터 관계도<br />
휴일날 2013년 버전 <위대한 개츠비>를 본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을 맡은 영화였다. 잭 클레이톤 감독의 1974년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개츠비에 빠져살았던 32년(1981년쯤에 부산 동래의 온천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의 환상이 재편집되는 기분을 맛보았다. 마침 그해에 영문학 강의 교수는 피츠제럴드의 원작 소설을 교재로 삼아 강독했고, 챕터가 넘어갈 때마다 스물 한 두살의 많은 젊음들은 저마다 개츠비가 되어갔고 순정의 중병을 앓고있던 참이었다. 스토리 구조는 단순하지만, 관계의 얼개는 제법 복잡하고, 캐릭터들의 내면을 이루는 시대의 공기를 읽어내면 열정적인 재즈의 황홀과 부박, 그리고 허망과 순수를 동시에 맛볼 수 있다. 40년 터울을 지닌 두 개츠비를 내 식대로 비교해본다면, 로버트 레드포드는 과묵하고 신비했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어쩐지 수다스럽고 가벼웠다. 내가 너무 무거워진 탓일까. 닉 캐러웨이의 명언도 최신작에선 간결하게 처리되어 작품 전체를 끌고가는 키를 놓친 듯한 느낌이 있다. 아버지의 말을 기억하는 것이었는데,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그 비판을 받는 사람이 스스로를 방어하기가 너만큼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라"는 주문이었다. 소설은, 개츠비가 살인 누명을 쓰고 피살되는 상황 속에서, 그의 섬세한 변론을 닉 캐러웨이가 대신 해주는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저 말은 곱씹을 만하다. 언론을 위해서도 얼마나 중요한 말인가.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한장면.
소설도 옛영화도 가물거려서, 명쾌하지는 않지만, 개츠비의 연인이었던 데이지가 미화된 느낌도 불편했다. 데이지와 개츠비는 처음 만났을 때도 서로 사랑을 느꼈다고 보기 어려웠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보고 반했지만 데이지는 자신을 좋아하는 많은 젊은 녀석들 중의 한 사람일 뿐이었고, 그 이상으로 기억하지 않았다. 특히 돈이 없고 장래가 유망하지도 않은 개츠비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런 데이지의 속물스러움을 루어만 감독은 면제해주었다. 속물을 사랑하는 순수함이라는 구도가 지닌 풍자성이, 지금의 현실 속에서 그렇게 맛있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보다는 여자 쪽도 순정이 있는 사람으로 추켜세워 달달한 러브스토리가 되는 게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데이지는 막판의 변심에 이르기까지는 착하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그건, 푸른 등대불빛으로 상징되는 개츠비의 '무모하고 허망한' 지향을 드러내는데는 방해가 되는 설정이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한장면.
이제 스토리를 조금 따라가보자. 개츠비는 군인 시절 데이지를 만나 사랑을 했지만, 재산도 출신도 보잘 것 없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았다. 상심한 이 청년은 꼭 돈을 모아 데이지의 마음을 사로잡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한다. 5년 뒤 그가 큰 부자가 되어 돌아왔을 때 데이지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해 있었다. 오로지 데이지와 사랑하는 일만이 목표였던 이 남자는, 직선으로 달리는 등대불빛처럼 이 좌절을 인정하지 못하고 사랑을 추구한다. 그가 추구한 사랑은 오직 그녀를 다시 한번이라도 보는 일이었다. 개츠비는 데이지가 살고 있는 만(灣)의 맞은 편에 대저택을 구입하여 날마다 불특정 손님들을 모시는 이상한 파티를 연다. 데이지가 찾아오도록 함이었다. 그리고 개츠비의 이웃 중에 가난한 청년인 닉 캐러웨이가 살고 있고 그가 데이지의 사촌인 것을 알고는 접근한다. 그에게 만남을 주선해주도록 부탁하기 위해서이다. 닉은 데이지의 집에 놀러갔다가 남편인 톰이 데이지를 박대하고 정비공의 아내와 외도를 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가운데 개츠비는 데이지를 만나 자신의 황금색 차를 몰고 드라이브를 한다. 차 운전석에는 데이지가 앉아있었다. 이 차는 정비공의 아내를 치어 죽이고 만다. 개츠비는 이 사실을 숨긴 채 돌아와 풀장에서 수영을 하다가, 분노한 정비공의 총에 맞아 죽는다. 개츠비의 장례식엔 데이지는 오지 않았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주연배우.(왼쪽부터 캐리 멀리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개츠비는 자신이 모은 황금의 힘으로 속물인 데이지의 마음을 잠시 붙들 수 있었다. 그는 오직 그 관심만이 사랑의 해답이었기에 그럴 수 있는 자신의 상황에 대해 감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소통의 형식은 아니었다. 데이지는 자신의 범죄까지 개츠비에게 덮어씌운 채 스스로의 안정된 삶의 향유를 향해 다시 떠나버린다. 녹색 등대불빛을 사랑이라고 쫓았던 부나방은 그 불빛에 타죽은 셈이다.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본 사람들은 묻는다. 개츠비의 무엇이 위대하단 말인가? 천하의 바보짓을 하고 대책없이 죽어버린 존재가 어째서 위대하단 말인가? 1920년대 미국은 재즈에이지라고 불렀다. 작가 피츠제럴드가 만든 말이라고도 한다. 자본주의가 흥청거리기 시작하던 시절, 미국에 세계 황금의 절반이 몰려있던 시대, 주식과 채권, 자본과 부라는 이름의 '돈'세상이 거품처럼 일어나던 그 시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그 돈의 쾌락을 쫓아 다녔던 날들이었다. 그 중심이 뉴욕이었다. 피츠제럴드 역시 그 시대를 같은 방식으로 살다가 한방에 훅 꺼지듯 죽어갔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한장면.
온몸에 문신처럼 들어찬, 그 재즈시대의 향락과 광란, 부박한 열정과 '자아'를 잃어버린 껍데기를 느꼈고 그것을 이 소설 속에 쏟아넣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비웃듯 자본의 가장 속된 영역에서 자라나 가장 비자본적인 열정에 사로잡힌 돈키호테를 설정해놓았다. 그것이 개츠비이다. 세상인심이 돈에 미쳐 날뛰고, 온탕냉탕의 염량세태로 돌아가는 지경이 되었다 하더라도, 인간의 본연에서 우러나온 아름다운 사랑은 여전히 존재하며 그 속물들 속에서도 그것이 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그것이 위대함이다. 영화는 풍자보다는 러브스토리로 흥행 공식을 따르고자 했고, 그래서 개츠비는 사랑에 실패한 허망한 밀수업자의 최후를 보여주면서 막판의 망연자실을 부르지만, 그래도 곱씹어보면 개츠비는 위대하다. 지금 세상에 나왔더라도, 순정은 슬프고 아프지만 아름다움의 물거품으로 남으리라.
1974년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위대한 개츠비'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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