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번 성형 수술 마친 '금배지'…사실은 銀배지'世宗의 승리' 50년 만에 한글로"실린 무게 너무 무거워"…일부 배지는 서랍장 신세
의원배지.
[아시아경제 김동선 기자, 주상돈 기자, 김민영 기자, 김보경 기자] '금배지'. 크기(지름)는 어른 손톱만한 1.6㎝. 무게는 6g에 불과하다. 사람들에게 '금배지'로 불리지만 정식 명칭은 '국회의원 배지'다. 국회법 하위 법령인 '국회기 및 국회배지 등에 관한 규칙'에 규격 등이 세세히 규정돼 있다. 사람으로 치면 호적등본(가족관계등록부)인 셈이다. 하지만 국회의원 배지보다는 '금배지'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국회의원을 뜻하는 금배지의 상징성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환갑 넘긴 금배지, 10번 성형수술=금배지라는 말 때문에 금(金)으로 만드는 줄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의원 배지의 성분 99%는 은(銀)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금배지라 부르는 것은 한때 순금으로 제작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1964년 2월 제3공화국 6대 국회 때부터 한동안 국회의원들의 가슴에 순금 배지가 패용됐다. 유신정권 시절 10대 국회의원들에게 배지를 두 개씩 지급됐는데 그 중 하나가 순금으로 만든 진짜 금배지였으니 순금 배지는 십수년 동안 이어진 셈이다. 그 때문에 '금배지'는 으레 국회의원을 상징하는 말로 통용된 것이다. 지금은 국어사전에도 '국회의원임을 표시하는 배지'로 올라 있다. 처음 순금 배지를 만들어 당시 175명의 국회의원에게 지급될 때 말이 많았다. 당시 한 신문은 "한때 내핍생활이니 혁신운동이니 하는 구호에 어긋난다 하여 다소 말썽도 있었지만 결국 국회의원 위신을 고려해 금(金)으로 낙착을 보았다"고 전한다. 예나 지금이나 혁신은 국회의 과제였지만 그 무소불위의 권위 앞에 퇴색되고 마는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국회의원 배지는 1950년 개원한 2대 국회 때 생겼다. 금배지의 나이도 이제 환갑을 훌쩍 넘긴 것이다. 그 사이 국회의원 배지는 10번의 성형수술을 거쳤다. 간간히 전신 성형도 있었다. 2대에서 7대 국회(1954년~1971년)까지는 무궁화의 잎 모양이 선으로 표현되었다가 8대 국회부터는 무궁화 잎 안쪽이 다 채워졌다. 14대 국회 후반(1993)부터는 여기에 둥근 원판을 덧대 상하판 분리형으로 만들어졌고 올 4월 한자로 씌여진 '나라 국(國)'자 대신 한글 '국회'로 바뀌었다.◆30여개 공정 절반이 수작업=금배지는 경복궁 서쪽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5가길에 자리한 동광기업에서 30여개의 공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동광기업은 휘장·현수막 등을 제조하고 관공서의 행사 대행업을 하는 소기업이다. 금배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이렇다. 은을 납작하게 만들어 크기에 맞게 자르고 가운데에 글자와 테두리의 무궁화를 프레스로 찍어내면 제법 배지 모양새가 나온다. 인천 등지로 보내져 금도금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황금빛이 돈다. 등판에는 각 국회 대수와 일련번호를 조각(타공)해 넣는데 이 번호는 사람으로 치면 주민등록번호 같은 것으로 국회의원 등록 순서대로 교부받는다. 마지막으로 둥근 판과 배지 앞면을 붙여 넣으면 온전하게 배지가 완성된다.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 달고 다니는 만큼 배지 제작 공정은 꽤 까다롭다. 조금의 삐뚤어짐도 허용하지 않는데 3번 이상의 선별작업을 거치고 수시로 광택을 낸다. 30여개의 공정 중 손으로 일일이 해야 하는 수작업 과정이 절반을 넘는다.이렇게 만들어진 배지는 국회의원 당선자들에게 무료로 배포된다. 그러나 공짜라고 배지를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면 안 된다. 분실 또는 훼손했을 때에는 사유를 신고하고, 다시 받아야 하는데 이때는 제값(35000원)을 치러야 한다. 1만9500원이던 배지 가격은 19대 국회부터 두 배 가까이 치솟았다. 금값이 무섭게 뛰면서 은값이 덩달아 뛴 때문이다. 작은 볼트를 옷에 찔러 넣는 볼트형(나사형)이 기본 사양인데 15대 때 한 여성의원의 건의로 핀형 배지도 함께 만들어졌다. 볼트형 배지를 착용하면 옷에 구멍이 난다는 이유로 다른 형태를 요청한 것이다. 덕분에 국회의원 배지는 그렇게 2개의 사양이 되었다. 소량으로 주문 제작되는 핀형 배지는 볼트형보다 5000원가량 더 나갔다. 그러나 19대부터 볼트형이나 핀형 배지 모두 35000원으로 같은 값이 되었다.
19대 국회의원 배지(왼쪽)와 50년 만에 한글로 바뀐 현재 의원 배지.
◆'國' 子 50년 만에 다시 한글로=국회의원 배지의 '국(國)'자 표기가 종종 이슈가 되기도 했다. '나라 국(國)'자의 테두리를 주변의 무궁화와 함께 형상화하면서 얼핏 보면 의혹을 나타내는 '미혹할 혹(或)'자로 보여 비아냥거리가 된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다. 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을 상징하는 배지인데 굳이 거기에 한자(漢字)를 써야 하느냐는 게 논란의 핵심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를 상징하는 마크도 '정부(政府)'라는 한자 표기를 대신해 한글로 '정부'라고 바뀐 지 오래 됐다는 논리까지 더해졌다. 물론 이 '국(國)'자가 한때 한글로 표기된 적도 있었다. 5대와 8대 국회 때다. 그러나 이때는 반대로 옷에 달린 배지가 돌아가면 '국'자가 '논'자가 되어 '국회가 논란만 일으킨다'거나 '국회의원이 논다'는 의심을 받는다는 이유로 다시 한자로 바뀌었다.이후 2년 전 노회찬 전 의원이 '국(國)'을 한글 '국회'로 변경하는 규칙안을 발의했다. 또 지난해 2월에는 박병석 의원 등 12명 의원이 '국(國)'을 한글 '국'으로 교체하는 방안을 내놓았지만 호응을 얻지 못했었다. 하지만 올 들어 국회 배지 한글화 추진에 대한 긍정적인 분위기가 마련됐고 국회사무처는 국회의원 배지 및 국회기의 한글화 여부와 문양 시안에 대해 전체 의원을 상대로 설문조사 작업을 거쳤다. 결국 지난 4월 관련 내용이 지난 국회를 통과해 배지에 한글 '국회'가 새겨졌다.◆의원 표식 넘어 권위의 상징=노태우 대통령의 퇴임 이틀 전인 1993년 2월22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현재의 배지 관련 규칙안이 통과됐다. 이때 반대토론에 나선 원광호 의원은 "(국회의원 배지 수정 논의가) 시군구의원 배지와 구분이 안 되니 국회의원의 권위가 없어졌다는 발상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국회의원의 권위를 상징하는 배지를 지방의회 배지와 차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박준규 국회의장은 본인이 국회의원을 하는 동안 국회 배지가 5번이나 바뀌었는데 그동안엔 본회의 결의가 없다가 이번에는 본회의 결의까지 한다고 회의록에 남아 있다.국민이 뽑은 300명의 대한민국 국회의원들만 이 배지를 가슴에 붙이고 다닐 자격이 주어지만 요즘에는 서랍 속에 잠자는 신세를 면치 못하는 배지들도 많다. 국회의원들이 '금배지'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 인식을 의식한 것이다. 배지 패용은 강제사항도 아니다. 한 재선 의원은 7년 동안 한 번도 패용하지 않았다. 대신 의원 배지를 한 개 더 신청해서 하나는 아버지에게, 나머지 하나는 장인에게 주었단다. "6g밖에 안 되는 배지지만 의원 배지에 실린 무게가 너무 무거워 차지 못하겠다"는 게 해당의원의 설명이다.그러나 과거 국회의원들에게 배지는 권위의 상징이자 때묻히고 싶지 않은 자신의 또 다른 분신과 같았다. 50년 전 한 신문은 금품 수수 혐의로 국회의원 4명이 법정에 출두했는데 증언대에 선 4명 모두 배지를 떼고 나왔다고 적고 있다. 부정(不淨)한 곳에 '선량(選良)의 상징'을 두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div class="break_mod">◆12代부터 납품하는 동광기업 국회의원 배지를 관리하는 국회사무처는 4년에 한 번 선거에 맞춰 배지의 주재료인 은(銀) 등의 가격 변동을 고려해 배지 납품 계약을 맺는다. 그런데 지금까지 수십년 간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상징하는 의원 배지를 제작·납품하고 있는 곳은 동광기업이라는 작은 업체다. 사무처는 예비용 50개를 포함해 350개의 납품계약을 1225만원에 맺었다. 올해 바뀐 배지도 동광기업에 맡겼다. 이 업체는 12대 국회 때 처음 납품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햇수로 30년간 의원배지를 독점 공급하고 있다. 이곳에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는 것일까?국회사무처 관계자는 "총 비용이 적어 수의계약이 가능하다"며 "과거 제작·납품에 특별한 문제가 없었고 제작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는 점 등을 감안해 동일한 기업에 제작을 의뢰하고 있다"고 말했다. '2000만원 이하의 물품·용역 계약은 수의계약할 수 있다'는 국가계약법에 따른 것으로 독점 공급은 법적으로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이다.회계 서류의 보존기간이 5년인 탓에 동광기업이 정확히 언제부터 배지를 납품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관계자의 증언도 엇갈린다. 다만 이유진 동광기업 대표(45)에 따르면 30년 전부터 이 회사가 의원배지를 납품한 것으로 추정된다.동광기업과 의원배지와의 인연은 이 대표의 작은아버지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대표가 작은아버지에게 동광기업을 물려받아 첫 의원배지를 제작한 때가 1996년(15대 국회)인데 동광기업은 이전부터 국회에 의원배지를 납품해 왔다고 한다. "작은아버지에게 일을 배울 때부터 사무실에 지금과 모양이 다른 의원배지가 있었어요. 12대 혹은 13대의 의원배지로 기억합니다. 12대라고 치면 30년째 의원배지를 납품해 오고 있는 셈이죠."국회와 오랜 인연을 이어오고 있지만 이 대표는 의원배지 독점 공급의 특별한 비결은 없다고 한다. 다만 꼼꼼한 검수로 불량을 골라내는 것이 비결이라면 비결. 이 대표는 "의원배지를 만드는 특별한 기술이 있지는 않다"며 "누구든지 만들 수 있지만 그 배지를 우리가 만든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일을 한다"고 말했다.의원배지는 개원 초 국회사무처를 통해 각 의원들에게 1개씩 총 300개가 배포된다. 하지만 동광기업이 금형기계를 통해 찍어내는 의원배지는 1000여개. 성질이 무른 은이 주재료인 탓에 만드는 과정에서 불량이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또 이후 파손·분실에 따른 추가 납품 요구에 대비해 재고를 확보해 둔다.이 대표는 "100개 찍는다고 하면 불량이 20개 이상 나온다"며 "또 배지가 찌그러지는 경우에 대비해 여분의 배지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수리비용은 배지의 파손 정도에 따라 정해진다. 수리가 가능한 경우 무상으로 수리를 하고 부주의에 의한 파손으로 수리를 할 수 없을 경우에는 의원이 자비로 다시 구매해야 한다.
[관련기사]김동선 기자 matthew@asiae.co.kr주상돈 기자 don@asiae.co.kr김민영 기자 argus@asiae.co.kr김보경 기자 bkly477@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기획취재팀 김동선 기자 matthew@asiae.co.kr기획취재팀 주상돈 기자 don@asiae.co.kr기획취재팀 김민영 기자 argus@asiae.co.kr기획취재팀 김보경 기자 bkly477@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