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대구서 열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합동생일파티'
[아시아경제 김민영 기자] 13일 대구 호남정, 정오가 임박하자 대구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자원봉사자들과 운영위원들의 손놀림이 분주해졌다. 이들은 '김분이', '이선옥', '이수산' 이름이 쓰인 플래카드를 벽에 붙이고 풍선을 달았다.이날은 5월에 생일을 맞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합동생일파티'가 열리는 날이었다. 생일파티는 대구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모임에서 준비했다. "할머니들 도착했어요." 이권희 대구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조직국장이 식당 안으로 들어서며 말하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할머니들 맞을 준비를 했다. 이선옥 할머니(91)가 휠체어를 타고 등장했고 뒤이어 이수산 할머니(88)가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식당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김분이(88) 할머니는 이날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참석하지 못했다. 장정 두 명이 휠체어에 탄 이선옥 할머니를 양쪽에서 번쩍 들어 떡 케이크가 놓인 생일상 앞으로 옮겼다. "분이 많이 아프대?" 김분이 할머니가 아파서 오지 못했다는 말에 이선옥 할머니가 느릿느릿 이수산 할머니한테 물었다. "그렇다나봐. 나는 백 살까지 살아서 일본한테 사과받을꺼야." 이수산 할머니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날 합동 생일파티에는 안이정선 대표를 비롯해 시민모임 관계자 5명, 전ㆍ현직 운영위원, 정순천 대구시의원, 자원봉사자 등 18명이 함께했다. 지난해 케이블 프로그램의 한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대구시립무용단 김분선ㆍ송경찬씨는 바디선물 세트를 사들고 왔다. 이날 대구의 한 지역방송에서 생일 파티 현장을 찍겠다고 왔다. 기자가 방송 카메라를 얼굴 앞에 들이밀자 할머니들이 손사래를 쳤다. 얼굴은 찍지 말라는 것이다. "동네 사람들 눈이 제일 무서워." 이수산 할머니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할매, 오늘 생일인데 한 말씀 해주세요." 이수산 할머니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그렇게 이 할머니의 증언이 시작됐다. 할머니는 1928년 경북 영일군에서 9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열두 살 때부터 포항 바닷가에서 물질을 하며 해삼ㆍ멍게를 따서 살림에 보탰다. 열다섯 살 때 중국 방직공장에서 한 달 일하면 한국서 일 년치 일한 봉급을 받을 수 있다는 일본군의 꼬드김에 넘어가 중국으로 건너갔다. 집에 말하면 못 가게 할까봐 몰래 짐을 챙겨 따라 나섰다. 막상 중국에 도착하자 공장이 아닌 여덟 동 건물이 딸린 '위안소'라는 곳이었다. 그때 거기 붙들린 조선 처녀는 모두 일곱 명이었다. 할머니는 말했다. "포항에서 일곱명이 갔는데 살아온 사람은 내 밖에 없다."1944년 11월에 붙잡혀가 이듬해 3월, 위안소에서 만난 갑숙이, 연옥이와 탈출을 도모했다. 가까스로 한 가정집에 몸을 뉘일 수 있었다. 이제 살았다 싶었다. 새벽 3시 남편이란 사람이 집에 들어왔다. 아내와 속닥거리더니 그 길로 헌병대에 가서 '위안소에서 온 조선 처녀들 같다'고 일러바쳤다. 다시 지옥 같은 위안소로 되돌아갔다. "또 도망치겠는가?" 주동자로 지목된 할머니에게 모진 고문이 이어졌다. 매질로 끝나지 않았다. 일본군은 할머니의 가슴팍과 엉덩이를 인두로 지졌다. 당시의 상황을 전하면서 할머니는 윗도리를 가슴까지 끌어 올려 인두로 지져 생긴 상처를 보여줬다. "일본이 전쟁에서 지고 저항한지가 70년이 됐다. 그래도 아직도 내 몸에는 상처가 남아 있다. 몽둥이로 맞은 자리는 삭는데 불로 지진 데는 아직까정 안 낫는다." 할머니가 몸서리 쳤다. 해방을 앞두고 중국 위안소 건물 지붕에 불이 붙었다. 미군의 폭격이었다. 할머니는 마침 화장실에 있었다. 구사일생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갑숙이 등 조선 처녀 6명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불에 타 죽었다. "지붕에 불이 붙으니 바깥에서 문을 걸어 잠갔어. 그 안에서 다 타죽었지.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원통함을 알았으면 좋겠어."아픈 기억을 끄집어내는 동안 할머니는 생일상을 손으로 쳤고 이따금 울먹였다. "할매 오늘 또 잠 못 주무시겠네…" 누군가 한 명이 말했다. "할머니가 이야기하시는 것은 굉장히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예요." 안이정선 대표가 말했다. 위안소에서 군인들을 상대하면서 할머니도 모르게 임신한 사실을 알았다.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데 지워야지 어떻게." 그때 자궁적출 수술을 받은 할머니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됐다. 대신 할머니는 중국에서 1남1녀를 입양했다. 지금은 한국에서 함께 살고 있는 아들은 중국에서 경찰이었다. 할머니의 영구귀국 결심에 서둘러 퇴직해 어머니와 동행했다. 며느리는 아직 중국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아들은 어머니의 몸에 난 상처를 보고 '젊었을 때 병을 앓았나 보다'라고 막연히 생각했다고 한다. 김동원 감독이 '끝나지 않은 전쟁(2008년)'을 찍을 당시 비로소 어머니가 위안부 피해자란 사실을 알았다. 이야기 도중 지인의 남편이 술만 마시면 손찌검을 한다고 했다. "요새 맞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사람들이 남편이란 작자를 성토하자 할머니가 제지한다. "내는 그런다. 네가 잘못했으니깐 맞는 기라고." 사람들이 한숨을 쉰다. 위안소에서 걸핏하면 맞았던 기억은 이유 없는 폭력에 이렇게 면죄부를 준다. 이것 역시 일본군 위안부가 낳은 또 다른 피해다. 이 할머니처럼 심신에 상처가 화인처럼 박힌 위안부 피해 생존자 할머니들은 국내외 54명. 일본군의 사과와 배상을 받아내기 위해 힘을 실어줘도 시원찮을 마당에 "일본군의 사과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발언을 한 문창극 국무총리 내정자가 할머니는 괘씸하다. "그 사람(문창극 국무총리 내정자)이 말하는 걸 뉴스에서 직접 봤는데 그런 사람이 우리나라의 총리가 되면 안 된다. 일본군이 내(나)를 열다섯 살에 끌고 가서 때리고 욕하고 불로 지지고 했는데 그 아픔을 저렇게도 모르는가." 김민영 기자 argus@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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