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박병희 기자] 유럽연합(EU)은 지난달 말 유럽의회 선거에서 사실상 '정치적 사망 선고'를 받았다. EU 탈퇴 내지 거부를 주장하는 정당들이 대거 원내 의석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영국 독립당, 프랑스 국민전선, 그리스 시리자 등이 적어도 유럽의회에서는 각 국의 원내 1당으로 올라섰다. 언젠가부터 유럽에서 치러지는 선거는 EU 체제를 받아들일 것이냐 말 것이냐를 선택하는 문제가 됐다. 여기서 현 EU 체제란 '최대 맹주' 독일을 받들어 모셔야 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이미 EU는 처음 태동했을 때의 이상적인 모습인 '하나의 유럽'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독일만 잘 먹고 잘 사는 구도 속에 중심과 주변으로 나뉘어졌으며 유럽의회 선거를 통해 이럴 바에야 차라리 '판을 깨자'는 민심이 비등하고 있음이 확인됐다. ◆독일의 리더십= 헤지펀드 대부 조지 소로스는 유로존 부채위기가 극에 달했던 2012년부터 독일의 유로존 탈퇴를 주장하고 있다. 리더십을 보여주지 않는 독일 때문에 유로존이 위기를 맞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도 2012년 4월 유로존 위기의 해법은 독일의 유로존 탈퇴라고 꼬집었다. 타임은 독일이 유로존에서 탈퇴하면 당시 부도 위기에 몰렸던 그리스 등 소위 피그스(PIIGS: 이탈리아·스페인·포르투갈·그리스·아일랜드) 국가들이 독일이 요구하는 긴축 부담에서 벗어나 경제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독일이 긴축이라는 잘못된 정책 방향을 주도하고 있어 유로존 전체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독일은 EU와 유로존이라는 '허울 좋은(?)' 시스템을 이용해 철저하게 자국 이익을 취하고 있다. 부양 정책을 취할 경우 EU 내에서 가장 큰 경제 규모를 갖고 있는 독일은 가장 많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독일이 부양이 아닌 긴축을 통한 경제 회복을 추구하는 근본적인 이유다. 독일은 마르크에 비해 평가절하된 유로를 이용해 수출을 늘리고 자국 경제를 살찌우고 있다. 반면 제조업 경쟁력이 약한 남유럽 국가들은 유로를 도입한 후 노동비용 상승 등으로 더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하나의 유럽을 지향하는 만큼 독일은 다른 국가들의 어려움을 보살피는 미덕을 발휘해야 했는데 독일은 이를 거부했다. EU의 리더십 문제가 끊이지 않는 이유다.
◆대안의 부재= 'EU의 2인자' 프랑스는 2012년 5월 대선에서 과감한 선택을 했다. 17년 만에 좌파에 정권을 넘긴 것이다. 독일을 상전으로 모실 수 없다는 심리는 대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은 메르켈 총리와 찰떡 호흡을 과시하며 '메르코지'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독일에 대한 반발은 사르코지의 패배로 이어졌다. 당시 프랑수아 올랑드 사회당 후보는 메르코지가 추진했던 긴축에 맞서 성장 전략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고 그는 프랑스 24대 대통령에 올랐다. 프랑스 국민들은 그가 경제 성장을 위해 각종 부양책을 추진하고 긴축 일변도의 메르켈에 제동을 걸어줄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대항마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올랑드는 대안을 보여주지 못 했다. 오히려 취임 후 후보 시절 공약과 반대되는 긴축 정책을 추진하면서 구설에 올랐다. 프랑스 국민들의 기대감은 실망을 넘어 배신감으로 바뀌었고 그는 현재 역대 가장 인기 없는 프랑스 대통령 중 1명이 됐다. 반면 메르켈은 승승장구하고 있다. 그가 이끄는 기독민주당은 지난해 총선에서 과반에 불과 5석 부족한 압승을 거뒀고 메르켈은 3선 총리가 됐다. 파이낸셜 타임스(FT)는 메르켈이 남유럽 위기 국가들에 대한 부채 탕감을 거부하고 과도한 정부지출을 불허한 것이 총선 승리의 배경이 됐다고 분석했다. 이런 메르켈에 압승을 안겨준 독일 국민들도 다른 유럽 국가의 경제위기에 아량을 베풀 뜻은 없어 보인다. ◆분열에 대한 우려 커져= 사르코지에 실망하고 올랑드에 배신당한 프랑스 국민들은 이번 결국 유럽의회 선거에서 극우 세력인 국민전선을 선택했다. 2012년 대선에서 EU 탈퇴를 주장하며 3위에 올랐던 마린 르 펜 국민전선 대표가 차기 프랑스 대통령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EU는 독일 뜻대로 움직인다는 것을 옆에서 지켜본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2017년까지 EU 탈퇴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이라며 집권 연장을 위한 승부수를 던졌다. 이처럼 EU에 대한 반대 의사 표현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향후 유럽에서 치러질 선거에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유다. 게다가 영국 스코틀랜드와 스페인 카탈루냐의 분리독립 움직임도 EU 회원국이 탈퇴에 나서도록 자극하는 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스코틀랜드는 오는 9월18일 영국으로부터 분리독립 여부를 놓고 국민투표를 치른다. 칼 빌트 스웨덴 외무장관은 최근 FT 인터뷰에서 스코틀랜드가 분리독립할 경우 EU에 엄청난 파장을 미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유엔 주재 발칸반도 대사를 지낸 그는 스코틀랜드의 분리독립은 다른 지역의 분리독립을 자극해 EU의 발칸반도화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발칸반도는 유독 분쟁과 충돌이 잦아 유럽의 화약고로 불린다. 스코틀랜드 외에 스페인의 카탈루냐 주정부도 오는 11월9일 중앙정부가 반대하고 있는 분리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할 예정이다. 그 외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스페인의 바스크, 이탈리아의 남티롤, 벨기에의 플랑드르 등이 중앙정부로부터 분리독립 내지 자치를 요구하고 있다. 카탈루냐의 경우 스페인 GDP의 20%를 담당하고 있다. 카탈루냐는 중앙정부가 카탈루냐에서 막대한 세금을 거둬 재정 여건이 어려운 다른 지방정부를 돕는다는데 불만을 품고 독립을 추진하고 있다. 부채위기가 분리독립의 도화선이 된 셈이다. 올해 유럽 경기는 2010년 시작된 부채위기 충격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회복세를 보일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부채위기가 남긴 내상은 깊었고 이는 선거를 통해 표출되고 있다. 부채위기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경제 실험이라는 유로 체제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의구심을 낳았고 지금 EU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다.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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