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광주에 있는 전남도청 건물 안 한 방에 응접탁자를 사이에 두고 바로 그 사람 건너편에 앉아서 '이 사람 머지 않아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눈길이 내 눈을 응시했고 나는 그도 자신이 곧 죽으리라는 걸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1980년 5월26일 광주 시민군 대변인을 취재한 브래들리 마틴 미국 볼티모어선 기자는 이렇게 회고했다.(샘이깊은물ㆍ1994.5) 마틴은 임박한 죽음에 직면해서도 점잖고 상냥한 그의 눈빛에 충격을 받는다. 마틴이 그에게 묻는다. "변변찮게 무장한 채로 군대에 저항하다 죽을 것인가, 아니면 항복할 것인가?""우리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울 것이다."기자회견 뒤 그는 저녁에 서울로 돌아와 기사를 보냈다. 기사는 그러나 지면에 실리지 않았다. 군부가 광주를 진압했다는 소식이 마감 전 도착한 것이다. 마틴은 그 대변인도 그때 숨졌다는 사실을 듣는다. 그는 '군사 통치 아래 있던 남한 땅의 비극'을 그 대변인에 초점을 맞춰 쓴 새 기사를 송고한다. 기사는 "그 학생의 이름을 알았다면 여기 쓸 수 있을 텐데"라고 끝맺었다. 그는 그해 여름 인도 지국장으로 떠난다. 그가 다시 한국을 찾은 것은 1993년, 준비 중인 책과 관련한 자료를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때 자신이 쓴 광주 시민군 대변인 기사를 읽은 재미교포 독자를 통해 그 대변인이 윤상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광주에 가서 윤상원의 가족과 친지, 동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윤상원은 전남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다니던 은행을 그만두고 야학활동과 민주노동운동을 벌이던 중 5ㆍ18 광주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광주에서 "윤상원이 당시 유일하게 전략적인 관점을 가진 인물이었을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최후까지 버티면서 항복을 거부해 그 정권이 치러야 할 대가를 올린다"는 전략이었다. "만일 너희가 사람을 더 많이 죽일 배짱이 없으면 물러나라, 그럴 배짱이 있다면 스스로 야만인임을 증명하라"는 것이었다. 윤상원은 자신을 희생해 투쟁을 완수함으로써 다른 데서도 항쟁이 일어나기를 기원했다. 그가 삶을 바친 뒤, 그가 바란 대로 민주화의 도도한 파도가 일어났고 결국 독재를 무너뜨렸다. 오늘은 윤상원이 스스로 택한 총탄에 맞아 서른 살의 짧은 삶을 마감한 날이다. 백우진 기자 cobalt100@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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