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꽃 피는 숲에 저녁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오른 섬들은 바다에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 싶었다. 뭍으로 건너온 새들이 저무는 섬으로 돌아갈 때, 물 위에 깔리는 노을은 수평선 쪽으로 가서 소멸했다. 김훈 소설 '칼의 노래'의 첫 대목이다. 소설가는 '꽃이 피었다'로 소설의 첫 문장을 삼을지, '꽃은 피었다'로 할지를 놓고 며칠 고민했다고 한다. 김훈은 산문집 '바다의 기별'에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꽃이 피었다'는 꽃이 핀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언어이고 '꽃은 피었다'는 의견과 정서의 세계를 보여주는 언어입니다." 과연 그러한가. 소설가의 선택은 적절했지만, 설명은 실제 용례와 약간 미끄러졌다. 우선 화자(話者)가 첫 문장에서 듣는 사람의 관심을 어디로 유도할 때에는, 문장에서도 그 대상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초점이 맞춰지는 대상을 바꿔보자. '남해 섬마다 주인 잃은 배'로.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할까? '남해 섬마다 주인 잃은 배가 떠다니고 있었다'일 게다. 이로부터, 말하는 사람이 관심을 갖는 대상이자 듣는 사람의 이목을 그리로 이끌고자 하는 대상에는 '은ㆍ는'이 아니라 '이ㆍ가'를 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이ㆍ가'가 아니라 '은ㆍ는'을 첫 문장에서 쓰는 건, 다른 주어를 염두에 둠을 전제로 한다.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는 꽃은 피었지만 다른 무언가는 피지 못했거나 시들었거나 졌거나, 하여간 피었다와 비교가 되는 어떤 상태라는 사실을 함축한다. 만약 소설가가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고 첫 문장을 시작했다면, 그는 둘째 문장에서는 독자의 시선을 꽃이 아닌 다른 대상으로 옮겨야 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이 풀어가는 식이다.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 섬 마을 집은 곳곳이 불타 무너졌다.' 화자가 자신의 시선을 꽃에 맞추고 그 초점을 숲으로 넓히고 숲에 저녁노을이 비쳤다는 정경을 추가한 뒤 다시 줌아웃해 섬으로 시야를 넓히는 순서의 서술에서 첫 문장이라서 '꽃이 피었다'가 맞다. 백우진 국제부 선임기자 cobalt100@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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