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보성전문학교 졸업사진.
"오직 양심과 이성에 따라 재판하라"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역임한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이 한 말이다. 13일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무료 변론하고 건국 초기 사법권 독립의 초석을 닦았던 김병로 선생의 서세(逝世) 50주기를 맡아 그를 추모하는 열기가 뜨겁다. 1888년 1월 전북 순창에서 태어난 김병로 선생은 일본 메이지대학과 니혼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서는 조선인이 변호사 시험에 응시할 수 없었다. 이에 식민지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경성전수학교, 보성전문학교 등에서 강의를 하며 수많은 법학 논문을 발표했다. 조선총독부는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1919년 부산지법 밀양지청 판사로 특별 임용했다. 그러나 김병로 선생은 법률 지식을 얻어 조국의 독립을 쓰고자 판사 임명을 받았기 때문에 경력 1년만을 채운 뒤 판사직을 떠났다. 훗날 선생은 "일정(日政)의 박해를 받아 비참한 질곡에 신음하는 동포를 위해 도움이 될 수 있는 행동을 하려고 변호사가 되려는 꿈을 가졌다"고 회고한 바 있다. 1920년 서대문에서 변호사로 개업한 그는 안창호 선생 사건, 김상옥 선생 사건, 의열단 사건, 6ㆍ10 만세 운동 사건 등 100여 건의 민족항쟁 사건을 무료로 변론했다. 스스로 신간회 참여 독립운동가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미군정기인 1946년 사법부장(현 법무부장관)에 취임해 초기 사법부 구성과 기본법률 제정에 기여했다. 1948년에 초대 대법원장으로 임명돼 1957년까지 재임하며 법관들에게 "오직 양심과 이성에 따라 재판할 것"을 주문하는 등 사법부가 독립적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강직하고 올곧은 성품으로 알려진 그는 대법원장으로 재직하며 이승만 대통령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1954년 정부가 사사오입 개헌을 단행하자 "절차를 밟아 개정된 법률이라도 그 내용이 헌법 정신에 위배되면 국민은 입법부의 반성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며 강도 높게 비판한 사건은 유명하다. 그는 재야 법조인이 되어서도 독재정부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김병로 선생은 항상 법관들에게 '공직자로서의 청렴'을 강조했다. 선생이 손잡이가 부러진 도장을 10년간 사용했다는 일화는 지금까지도 법조인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한편 대법원은 대법원 1층 대강당에서 법무부 장관과 전직 대법원장, 검찰총장, 김 전 대법원장 유족 등이 참석한 가운데 고인의 업적과 생애를 되돌아보는 추념식을 가졌다. 박나영 기자 bohena@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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