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동여담]찬란한 그녀의 변신

무슨 바람이 분 걸까. 깔아져 있던 아내가 돌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거의 일주일째 침대와 거실 TV 앞 소파에서 지냈다. 밖에도 나가지 않았고, 밥도 먹는 둥 마는 둥(주방 싱크대가 물기 없이 뽀송뽀송했고, 냉장고에선 사람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았다). 목소리는 까끌까끌했고 그나마 대화도 끊겼다. 아내가 쳐져 있었다면, 이쪽은 숨죽여 지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살금살금 일어나 조용조용 샤워하고 흔적 없이 밖으로 빠져나왔다가 야밤을 틈타 기어들어갔다. 특별히 아쉽거나 불편한 건 없었다. 구겨진 와이셔츠는 조끼나 브이넥 니트로 가리면 그만이었고, 24시간 편의점에는 먹을 것이 넘쳐났다. 이번에 깨달은 '생활의 지혜'가 하나 있으니 편의성만 놓고 보면 집보다 편의점이 훨씬 낫다는 것이다. 괜히 편의점이 아니었던 것이다. 밥과 밑반찬, 김치는 물론 미역국, 황태해장국, 된장국 등 온갖 종류의 국이 다 있고, 밥과 찬을 일일이 고르기 귀찮은 이들을 배려한 듯 도시락도 종류별로 갖춰놓고 있다. 밥이 싫으면 면을, 그것도 24시간 골라 먹을 수 있다. 음식에 관한 한 이제 더 이상 남성이 여성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아도 되는 편리한 세상이 편의점이란 이름으로 우리 앞에 활짝 열린 것이다(요즘 남자들은 도대체 무엇이 아쉬워 결혼을 하는 걸까). 변화의 바람은 금요일 아침에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시작됐다. 짧게 통화를 끝낸 뒤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창문을 열어젖히고, 이부자리를 털고, 청소기를 돌리고, 싱크대에도 물기가 되살아났다. 퇴근해보니 옅은 화장에 미장원도 다녀온 듯하다. 냉장고에 밑반찬이 하나둘 늘어났고, 주방 뒤 베란다에 나가보니 새로 담근 김치를 통째로 내놓고 익히는 중이었다. 텅 비어 을씨년스럽던 가스레인지 위에 크고 작은 냄비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냄새로 미뤄 하나는 소고기 장조림, 그 옆은 파를 듬뿍 넣은 얼큰한 육개장, 그 앞은 생선조림으로 추정된다(종목들이 내 취향은 아닌지라 구태여 열어보지 않았다).  그리고 일요일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주방으로 가보니 웬 청년이 밑반찬에 잘 익은 김치, 장조림과 생선조림, 육개장으로 식사 중이다. 방학을 맞아 집에 온 둘째 아들 앞에는 옅은 화장에 머리 웨이브로 되살아난 아내가 활짝 웃으며 앉아 있고. <치우(恥愚)><ⓒ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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