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시리즈⑩ 낙원동 파고다 주변에만 있는 명소·명물
한편에 2000원, 주말에 1000명 넘게 몰리는 '실버 영화관' 39년째 무료 공연하는 사장님…벽은 감사장으로 가득 '스타 하우스'
지난달 30일 서울 낙원동 실버영화관 로비에서 영화 포스터를 보고 있는 어르신들의 모습. 실버영화관은 대형 멀티플렉스 영화관과 달리 지각을 해서 영화의 앞부분을 못 봤더라도 다음 회차에서 이어볼 수 있다. 백소아 기자 sharp2046@
[아시아경제 김보경 기자, 주상돈 기자, 김민영 기자] 어르신들의 쉼터인 파고다공원을 중심으로 낙원동 일대에는 시간을 거스르는 장소와 물건, 사람들이 즐비합니다. 바쁜 일상에서 이런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색다르지만 손때 묻은 잡화, 추억을 파는 가게, 그리고 그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표정은 따뜻하기 그지없습니다. 이 일대에서 손에 꼽을 만한 명소와 명물을 몇 가지 추려 소개합니다.
◆허리우드 실버영화관"어휴, 이러다 늦겠네. 같이 좀 탑시다." 서울 종로구의 낙원악기상가.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할머니 서너 명이 이 건물 엘리베이터를 향해 총총 걸음을 내딛습니다. 으레 여유롭고 느린 걸음만 있을 줄 알았던 낙원동에서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하는 모습이 의아합니다. 어르신들을 따라 함께 승강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금세 만원이 된 엘리베이터는 4층에서 승객들을 한꺼번에 쏟아냅니다.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허리우드 클래식-실버영화관'입니다. 이곳에선 55세 이상은 누구나 영화 한 편을 2000원에 볼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는군요.이곳 실버영화관에서 어르신들은 팍팍한 일상과 권태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여유를 누립니다. 365일 운영되는 이 영화관은 하루 네 번 국내외 유명 고전영화를 상영합니다. 상영관이 하나인데다 3~4일간 같은 영화만 틀어주지만 어르신들에게 인기가 꽤 높습니다. 매표소에서 티켓을 사고 로비에 앉아 입장을 기다리는 모습은 여느 대형 영화관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날은 1970년작 소피아 로렌 주연의 '해바라기'가 상영되고 있었습니다. 어르신 관객들이 20~30대 창창했던 시절에 봤던 추억의 영화를 되새김하는 것이죠.할아버지들로 북적이는 파고다공원 주변과는 달리 이곳은 할머니들의 발길이 잦습니다. 관객의 30%이상이 할머니들이랍니다. 로비에는 꽃무늬 옷으로 한껏 맵시를 뽐낸 할머니 부대를 비롯해 극장 데이트를 즐기는 노년 커플들도 눈에 띄네요. 오렌지 주스 한 컵에 빨대 두 개를 꼽고 마시는 70대 커플은 이제 막 수줍은 연애를 시작한 젊은이들처럼 풋풋해 보입니다.분홍색 머플러로 멋을 낸 이모(75) 할머니도 이날 3살 연상의 남편과 함께 영화관 나들이에 나섰습니다. "영화를 보다가 감상에 젖어 눈물까지 흘렸다"는 할머니의 얼굴에선 언뜻 소녀의 모습이 보이는 듯 합니다. 할머니는 여동생이나 여고 동창들과도 자주 이곳을 찾는다고 합니다. 이 할머니 같은 단골 관객만 1000여명에 육박한다는 게 극장 관계자의 설명입니다. 영화관 안은 노인들의 눈높이와 취향에 맞게 꾸며져 있습니다. 로비에는 기능성 신발과 틀니 세정제, 염색약 등을 파는 노인용품 전용매장도 들어서 있고, '베사메무쵸', '서핑 USA'와 같은 팝송이 흘러나와 향수를 자극합니다. 300여석이 갖춰진 상영관은 앞뒤 좌석 간격은 널찍하고, 한글 자막의 크기도 읽기 쉽도록 큼지막하게 박혀 나옵니다.상영관 앞에서 표를 받는 직원과 자원봉사자들도 모두 65세 이상의 어르신들로 포진돼 있습니다. 영화관이 문을 연 2009년부터 근무한 김종준(71) 할아버지는 "평일 하루 600~800명, 주말에는 1000명 이상이 영화를 보러 온다"며 "영화관 회원 8000여명에게 매주 상영작 정보를 문자메시지로 전송하는 등 꾸준히 홍보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이번 달에 이곳에서 상영되는 영화들도 '별들의 고향'(1974년·이장호 감독), '지상에서 영원으로'(1953년·프레드 진네만), '벤허'(1959·윌리엄 와일러) 등 국내외 고전이 망라돼 있으니 어르신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듯 합니다.
지난 10일 서울 종로구 스타하우스에서 어르신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스타하우스는 낮에는 찻집으로 밤에는 술집으로 변한다. 어르신들이 신청곡을 쓰면 밴드가 나와 어르신들의 구성진 가락에 바람을 실어준다. 백소아 기자 sharp2046@
◆가요주점 '스타하우스'실버영화관이 잠깐의 '여유'를 즐기는 곳이라면 무대에 올라 부르는 노래 한 소절로 '여흥'을 즐기는 곳도 있습니다. 파고다공원에서 종로3가역 5번 출구로 가는 길에 위치한 가요주점 '스타하우스'가 바로 그곳인데요. 차와 커피, 주류를 파는 이곳은 문을 연 지 올해로 17년째라고 합니다. 건물 2층에 있는 가게 안으로 들어서면 벽면을 빈틈없이 뒤덮고 있는 수천개의 감사장과 감사패로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유심히 들여다보니 수상자 이름이 하나같이 똑같네요.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이곳을 운영하는 김종수 사장(62)입니다.김 사장님은 39년째 전국 곳곳에서 무료 자선공연을 펼치고 있는 낙원동의 대표 '별난 인물'로 통합니다. 김 사장은 "20대 때부터 극장쇼 생활을 하다가 코미디언으로 데뷔했지. 쓰리보이, 백남봉 뒤를 잇는 원맨쇼 전문 코미디언이 되려다가 우연히 기회가 생겨 군부대 위문공연을 했는데 재미가 들려 그 후로 지금까지 쭉 자선공연을 하고 있어"라고 사연을 전했습니다. 지금까지 군부대, 교도소, 양로원 등에서 연 무료 자선공연만 해도 3000회가 넘는다는군요. 가게 벽면을 가득 채운 1400장의 감사장은 그의 삶을 보여주는 증표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김 사장은 "1990년대 초반엔 SBS에 좀 있었어. 큰 배역을 맡지 못해서 사람들은 잘 몰라. 무명 코미디언이지, 뭐"라며 허허 웃어제낍니다.저녁 8시 무렵이 되자 어르신들이 하나 둘씩 가게로 들어왔습니다. 대부분 무대 위에 올라 마이크를 잡고 노래 실력을 뽐내려는 사람들입니다. 1만원을 내면 색소폰, 전자오르간을 연주하는 2인조 밴드의 반주에 맞춰 세 곡을 부를 수 있고, 감상은 '무제한 공짜'입니다. 조영남의 '그대 그리고 나'를 열창하던 이영수(65) 할아버지의 무대가 끝나자 객석에선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할아버지는 "우리 같은 60~70대들은 젊었을 적 고생을 많이 하던 사람들인데 이렇게 즐겁게 노래를 할 수 있는 자리가 있어 좋지"라고 말했습니다.
김 사장은 "문화, 예술이 필요하지만 소외된 곳이 너무 많아. 이 주점도 그래서 만든 거고. 난 예산이 부족하니까 아무래도 한계가 많지. 예술인 단체들이 자선활동을 많이 해줘야 돼"라고 했습니다. 김 사장은 수익금의 10%를 위문 공연에 필요한 경비로 충당해서 쓰고 있답니다. 매년 겨울이면 강원도 철원의 군부대와 국가유공자들이 지내는 지방의 보훈병원를 찾는다고 하는데 올해도 위문공연 준비에 한창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도 늙어가고 있어 이제 그곳을 방문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는군요. 그는 "근데 집사람은 이런 거 무지 싫어해. 만날 나를 '무능한 사람'이나 '별난 사람'이라고 부른다고. 하긴 돈만 있으면 공연한다고 다 쓰는데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라며 멋쩍은 듯 웃었습니다.
◆구제 옷 "잘 샀지? 새 것 같잖아." 파고다공원 후문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길바닥과 건물 외벽을 진열대 삼아 옷을 파는 좌판이 늘어섰습니다. 재킷이나 바지가 이곳 구제 옷가게에서 취급하는 주요 상품입니다. 주인도 손님도 할아버지인 이 '옷가게'의 가격은 2000원에서 4000원. 부천에서 온 김모(75) 할아버지는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에 두툼한 갈색 체크무늬 재킷을 4000원에 구입하곤 "집에 가서 세탁 한 번 하면 깨끗하게 입지" 하며 흐뭇해합니다. 물 건너 어느 나라에서 누군가 입다 버린 헌 옷일 테지만 재킷은 신기하게도 맞춤옷마냥 할아버지 몸에 착 맞습니다. 원래 입던 얇은 재킷은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기분 좋게 길을 나섭니다. 옷을 판 할아버지도 기쁘긴 매한가지. 그는 꼬깃꼬깃한 1000원짜리 지폐 여러 장을 연신 손으로 넘겨가며 돈을 셉니다. "장사 잘 되세요?"라고 넌지시 묻자 할아버지는 "난 아무것도 몰라. 안 들려"하고 외면하면서도 지나가는 할아버지들에게 쉴 새 없이 판촉을 합니다. 장사 수완이 보통이 아닙니다.
◆브로커파고다공원 주변이기 때문에 목격할 수 있는 풍경은 또 있습니다. 바로 '브로커(공인중개업자)의 방문을 금한다'는 내용의 경고문인데요. 주로 종로3가역 근처 커피숍, 식당의 출입문이나 벽면에 붙어있습니다. 한 제과점 관계자는 "60대 전후의 양복 입은 할아버지들이 주문을 하지 않은 채 부동산 계약이나 상담을 하느라 2~3시간 죽치곤 한다"고 전했습니다. 피해 사례가 많다 보니 고육지책으로 점주들이 직접 경고문을 써 붙인 것이랍니다. 주말인 지난 10일 저녁에도 할아버지 두 명이 한 커피숍에 앉아 목청을 크게 높이고 있었습니다. 테이블 위에는 글자가 빼곡히 적힌 종이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고, 땅이니 건물이니 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영업점 없이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브로커들과 할아버지 여럿이 모여 있는 모습은 길거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데요. 노인들을 대상으로 부동산 투자를 유도하는 업자들이 몇 명 있는데, 그 중에는 '사기꾼'도 많다는 전언입니다. 취재 도중 실제로 한 할아버지는 "박정희 정권 시절에 보육원을 지으려고 정부가 싸게 매입한 땅이 있는데 지금 투자하면 나중에 큰 돈을 벌수 있다"는 신빙성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포장마차형 점집파고다공원 서문 주변에는 포장마차형 점집 10여개가 담벼락을 따라 늘어서 있습니다. 2010년께 정부가 '노점상 특화거리 사업'을 벌이면서 종로 대로변에 있던 점집들이 이 자리로 옮긴 것입니다. 이 길은 인적이 드문데다 바로 옆 도로에는 항상 외국인 관광버스가 여러 대 주차돼 있어 저녁이 되면 유난히 고립된 느낌입니다. 점집을 운영하는 50대 여성은 "큰 길가에 있을 때보다 매출이 많이 줄었지. 또 요즘 젊은 사람들은 사주팔자도 인터넷 들어가서 보잖아"라고 푸념하네요.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면 '파라솔형' 점집도 세 곳 있습니다. 파라솔을 지붕 삼아 흰 천막을 두른 게 전부인지라 바람이 불 때마다 세차게 흔들립니다. 정모(76) 할아버지는 직장생활을 하다가 10년 전부터 이 일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손님들의 사주팔자를 막힘없이 술술 이야기합니다. "용돈 벌이는 돼. 자식들에게 짐이 되기 싫기도 하고 해서 심심풀이로 나와"라고 하네요. 그날 할아버지는 수능을 치른 자녀 때문에 찾아왔다는 손님을 끝으로 오후 10시가 돼서야 자리를 파하고 일어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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