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저나 오빠한테 시 배우기로 한 것, 말짱 꽝이 되었으니 어쩌죠?” 하림의 눈과 부딪히자 그녀는 입가에 잠시 미소 같은 걸 떠올렸다. 왠지 쓸쓸하고, 슬픈 눈빛이었다. 하림의 가슴이 무언가에 찔린 듯이 아파왔다.“서울로 다시 갈거야?”“가야죠. 언니, 병원에 있는 동안은 내가 옆에서 봐줘야 할 것 같애요.” 소연이 다시 앞을 보고 걸어가며 말했다.“언제 가....?”“낼 모레쯤....?” 하림은 소연의 뒷모습에 눈길을 던졌다. 동그란 어깨 위에 출렁이는 노란 머리칼이 왠지 아프게 눈에 걸렸다.“오빤.... 언제 다시 서울로 가나요?” 소연이 앞만 보고 걸으며 말했다. “응. 곧.” 하림이 짧게 대답했다. 한동안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과수원 옆 흙길은 잡초로 덮혀 있었고, 여전히 마을에서는 앵앵거리는 마이크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하림은 그녀의 마음 속에 출렁이는 것을 가만히 온 몸으로 듣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때로는 말없음표가 더 많은 말들을 전해주고 있는지 몰랐다. “모두 떠나고 나면 골짜기가 텅 빈 것 같겠군요. 서울 가면 그 사람.... 다시 만날 거죠?” 이윽고 소연이 말했다. 그 사람....? 혜경이 말일 것이었다. “응. 아마도 그래야겠지.” 하림이 싱겁게 대답했다. “피이, 아마도 라니.... 어쨌든 오빤 좋겠다. 기다려주는 사람도 다 있구.” 그리고 이어서,“그래도 서울 오면 전화는 해 주실거죠?” 하고 말했다. 갑자기 그녀의 목소리가 젖었다. ‘바보.....’ 하림은 속으로 가만히 외쳤다. 하지만 최대한 감정을 억제한 채 유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당근이지.”“피이.... 하기 싫음 안 해도 돼요.” 소연이 돌아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와 눈빛이 마주 치자 하림은 이유없이 또 마음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걱정 마. 이 오빠가 약속 하나는 잘 지키는 사람이니까. 소연이한테 한 약속들, 시도 가르쳐주고 대학 가는 것도 도와주고.... 약속 한 거 다 지킬테니까.” 하림이 변명이라도 하듯 빠른 어조로 말했다.“정말...?” 소연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졌다.“그럼....!” 그러자 소연이 다짐이라도 하듯 장난스럽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하림은 잠시 있다가 피익, 웃으며 자기도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소연의 작은 손가락에 걸었다. “자, 약속해요! 우리의 꿈은, 꼭 이루어진다!” 소연이 짐짓 명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의 꿈.....? 우리의 꿈이라니....? 어떤 꿈일까....? 그런 꿈을 가져본 적이라도 있단 말인가? 하지만 미래는 누가 알겠는가. 두려워서 주사위를 던지지 못하는 사람은 끝내 어떤 사랑에도 도전해보지 못할 것이었다. 사랑이란 미래를 향해 던지는 주사위와 같은 것이다.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김영현 기자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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