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지키는 사람들]'아름다운 가업, 빛을 품다'..육근해 한국점자도서관

[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타닥, 타닥...." 건물 입구에 들어서자 타자 치는 소리가 요란하다. 점자 찍는 소리다. 여전히 점자책은 수작업으로 타자를 쳐야 만들 수 있다. 20만 시각장애인의 지식 보고인 '한국점자도서관'이 유일하게 점자책 발간 등의 역할을 짊어지고 있다.'한국점자도서관'은 서울 강동구 암사동 주택가 한 가운데 자리해 찾기도 만만치 않다. 4층 건물이기는 하나 면적도 협소한데다 건물도 꽤 낡았다. 점자도서관의 초라한 형상은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대신 말해 주는 듯 하다. 한국점자도서관은 최초의 시각장애인 전문 도서관으로 지난 1969년 종로에서 문을 열었다. 이후 북창동, 성내동, 천호동, 암사동으로 옮겨 다니며 40여년 이상 명맥을 이어온다.도 서관 설립자는 '시각장애인' 였던 육병일 선생이다. 육 선생은 '시각장애인의 알 권리, 읽을 권리'를 위해 수십억원의 사재를 털어 도서관을 설립하고 평생 점자책 제작 및 보급, 대여는 물론 시각장애인 자활을 도운 이다.현재 관장을 맡고 있는 육근해씨(53ㆍ문학박사)는 육선생의 2남3녀 중 막내다.육 관장은 일곱살 무렵 아버지 손을 잡고 강원도 두메산골에 사는 시각장애인을 찾아 나섰던 일을 잊지 못 한다. 막차가 끊겨 아버지와 함께 떨면서 시골 기차역에서 밤을 새웠던 일이다. 다음 날 시각장애인을 만나 구구절절한 사연을 들을 때는 어린 마음에도 몹시 슬펐다. 아버지는 당시 극동방송 장애인 재활프로그램 상담을 맡고 있었다. 아버지는 수많은 장애인들에게 자활의 길을 열어줬고, 직접 얘기를 듣고 싶다는 사람이 있으면 천리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육관장은 그렇게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눈 노릇을 하며 전국 곳곳을 다녔다. "장애인들이 아버지를 만나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가족한테조차 냉대 받 사연을 들려줬다. 그러면 아버지는 그를 데리고 나와 자활학교나 기술교육기관으로 보내주는 등 살 길을 마련해주곤 했다. 그저 어린 나이에도 아버지가 훌륭한 일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서관 운영이 숙명이 된 건지도 모르겠다."육 관장은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돌아오면 항상 점자 찍는 일을 했다. 다른 형제들도 어머니와 더불어 아버지 일을 돕고 위해 점자를 찍었다. 점자책이란 게 전혀 돈이 되는 일이 아니다. 도서관 운영도 국가가 지원하는 것도 아니다. 여러번 월세방을 전전하면서도 아버지는 도서관 일을 놓지 않았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점자책을 만드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점자도서관은 그처럼 '나눔'과 '봉사'로 삶을 일관했던 아버지와 그 뜻을 지켜 온, 한 가족의 내력이 고스란히 뭍어 있다. 운영이 어려워 문을 닫은 것도 여러 차례다. 육 관장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해 돈을 벌어 도서관을 도왔다. 이후 야간 대학엘 다닐 때도 도서관 업무를 병행했다. 육 관장은 "어머니와 형제들이 모두 헌신적으로 아버지를 도와 (나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육 관장은 육선생이 사망한 97년 이후 사무국장, 관장 등을 맡아 '가업'을 소명처럼 이어가는 중이다. 점자도서관에서 펼치는 사업은 다양하다. 점자도서, 묵점자 혼용도서, 그림책에 점자 라벨을 붙인 통합도서, 약시자를 위한 큰 글자책 등 지금까지 수천여 종의 책을 발행했다. 책은 일일이 수작업을 거쳐야해 대량생산이 불가능하다. 지금 점자도서관 산하 사회적 기업인 '(주)도서출판 점자'는 국내 유일한 점자출판사다. 이와 더불어 시각장애인을 위한 북소리 버스 운영, 점자도서 대출 서비스, 녹음 도서 제작 등 수많은 일을 한다. 그동안 점자책 제작 선진 기술 도입 및 점자도서 표준화 작업, 관련 연구 및 학술 토론 등을 펼치며 시각장애인 지적 향상을 지원해 왔다. 그러나 항상 운영난 등 많은 고충을 겪고 있다. 육 관장은 결혼 당시 시댁에서 사준 집을 팔아 운영비를 쓰기도 하고, 한 때 신용불량자로 고생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육 관장은 부모님의 손 때가 묻은 도서관을 끝까지 지킬 생각이다. 육 관장은 "선진 외국 이상으로 고급한 시각장애인 정보 서비스를 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 하는게 늘 아쉽다"고 말을 마쳤다. 이규성 기자 peace@<ⓒ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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