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 1호차 시작부터 대우차의 아픔까지…부평초 반세기

스토리가 있는 산업공단 <7> 부평국가산업단지

1955년 '시발(始發)' 첫 생산.. 1960년대부터 한국 자동차 산업 메카 성장2000년 대우그룹 부도가 직격탄..노후화된 시설 개선 등 지원 서둘러야

국산1호차 시발의 시승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미군 지프차 부품으로 만들어진 시발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우리 자동차 산업의 시발점으로 자리잡았다.

[아시아경제 이지은 기자] 대한민국은 자동차 강국이다. 세계 5위 자동차 생산국 지위를 8년 넘게 유지했으며 지난해에는 자동차 산업을 통한 무역수지 흑자가 처음 600억달러를 넘어섰다. 우리나라 전체 무역수지 흑자의 2배를 넘어서는 규모다. 한 해 수출하는 자동차 대수만도 300만대를 넘어선다. 그 누구도 우리나라가 자동차 생산 강국이라는 것에 토를 달지 못할 엄청난 숫자다. 하지만 처음부터 우리나라가 자동차를 잘 만든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도전들이 존재했다. 부평 국가산업단지는 그런 점에서 우리 자동차 산업의 초기 역사와 떼어놓을 수 없는 곳이다.  ◇첫 자동차 이름이 '시발'인 이유 = 우리 자동차 산업의 처음은 화려하지 않았다. 1955년 부평의 한 공장에서 '1호 국산차'가 탄생했다. 서울에서 국제차량공업사를 경영하던 최무성, 혜성, 순성 3형제가 미군이 쓰던 지프의 부품과 4기통 엔진을 조립해 만든 것이다. 이름은 '시발(SHIVAL)'. 한자로는 '시발(始發)'. 새롭게 시작한다는 뜻이다. 미군들이 버리고 간 지프차의 부품을 이용하고 드럼통을 펴서 차체를 얹은 조악한 제품이었지만, 6.25 전쟁 직후 폐허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으려는 우리 국민들의 열망을 반영했다. 생산 시설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만들어진 시발은 곧바로 선망의 대상이 됐다. 값이 8만환으로 고가에 속했지만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비록 조립한 차였지만 우리 자동차 산업의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였다. 시발을 밀어낸 것은 1962년 부평에 세워진 '새나라자동차'였다. 일본 닛산의 부품을 수입해 '닷도산', '블루버드' 등의 자동차를 생산했던 새나라자동차는 반짝 인기를 끌었으나 결국 1년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자체 부품이 아니었으므로 '국산 차'라고 부르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부산의 신진자동차가 새나라자동차를 전격 인수하면서 다시금 국산 차의 명맥은 이어진다. 신진은 시발의 뒤를 잇는 2호 국산차 '신성호'를 만들어내는 등 뛰어난 기술력으로 정부의 든든한 지원을 받아 자동차 양산을 시작했다. 부평공장에서 신성자동차가 만든 차는 '코로나','크라운', '퍼블리카' 등이었다. 제너럴모터스(GM)와도 합작했던 신성자동차는 결국 한국 측 지분을 산업은행에 넘기고 1978년 산업은행으로 사명을 바꾼다. 새한자동차는 향후 대우자동차의 전신이 되는 기업이다.
 ◇부평산업단지의 태동 = 부평산업단지도 자동차산업이 한창 태동하려는 60년대 중반에 기획됐다. 수출주도형 정책인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으로 인해 서울에서 가깝고 입지가 좋은 곳에 산업단지를 물색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첫 번째가 현재 구로디지털단지로 불리는 '구로공단' 이었고, 두 번째가 바로 부평국가산업단지였다. 일제시대부터 일제의 군수물자를 실어나르던 가장 큰 공업지역이었던 부평은 1960년대 들어와 근대적 공업도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서울과 인접해 이으며 수출입을 빠르게 할 수 있는 항구까지 갖춘 부평은 수출기지로서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부평변전소와 부평정수장이 있어 전기와 용수 공급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산업단지가 조성되기 전 부평산업단지 터

1965년 수출공단으로 지정돼 인가를 얻고 1966년 기공식을 진행, 효성동ㆍ갈산동ㆍ작전동 일대 21만여평의 땅에 산업단지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 5명 중 1명이 농업에 종사했고 단 3.8%만이 제조업에 종사했던 열악한 시기였지만 1968년 7월부터 공장을 가동한 지 5개월만에 입주기업들은 79만달러의 수출액을 기록하는 등 좋은 실적을 올렸다. 이듬 해인 1969년에는 50개 입주 기업체 중 14개 업체가 가동을 시작, 당초 수출 목표인 500만 달러를 40%나 초과한 703만 달러의 수출 실적을 기록했다. 1970년에는 50개 입주 업체 전체가 가동해 3099만 달러의 수출 실적을 기록하는 등 명실공히 수출 공단으로서의 면모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결국 1970년 인천 총 수출액의 42.5%가 부평산업단지에서 나오게 됐다. 새나라자동차, 신진자동차에 이어 새한자동차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평산업단지 바로 옆의 일반단지 지역에 터를 잡고 자동차를 생산했고, 부평산업단지 내 협력업체들이 부품 등을 납품하며 함께 성장하는 구도가 형성됐다.

1979년 2월5일 산업단지공단을 찾은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앞줄 왼쪽 첫번째)

 ◇대우차 시대의 아픔 함께 겪은 부평산단 = 1976년 신진자동차에서 새한자동차로 바뀐 지 2년만인 1978년 대우그룹이 새한자동차의 지분을 인수하면서 1982년 대우자동차로 사명이 바뀌었다. 그리고 대우자동차는 부평공장을 완공하고 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자동차를 생산ㆍ수출하기 시작한다. 1980년에 로얄살롱, 1982년 맵시, 1983년 로얄프린스, 맵시나 등이 만들어졌다. 아직도 7080세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국민차 '르망'도 부평 공장에서 만들어졌다. 1987년에는 최초의 자체 디자인 차량을 만들었고, 1989년에는 국내 최초 3000cc 엔진을 장착한 임페리얼이 탄생했다. 그야말로 승승장구가 계속되던 때였다. 하지만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복병이 자동차 산업계를 덮쳤다. 동남아에서 시작된 외환위기는 순식간에 우리 기업들을 하나둘 쓰러뜨려갔다. 수출역군이었던 자동차 업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1997년 기아가 부도를 맞았고, 대우도 2000년 11월 최종부도를 피하지 못했다. 대우자동차의 호황에 힘입어 성황을 누렸던 부평산업단지도 일순간 얼어붙었다. 글로벌 자동차 대기업인 제너럴 모터스(GM)가 나서서 대우자동차를 인수했지만 한 번 침체된 경기는 쉽게 살아나지 않았다. 수출 감소 현상이 나타나기까지 했다. 기계류 비중이 높은 부평산업단지 특성상 설비투자 감소로 수주가 많이 줄어들면서 기업들이 빠져나가는 '공동화 현상'도 벌어졌다. 부평 지역에 등록된 공장은 1995년 3300개에서 2003년 600여개로 줄었다. 십수년이 지난 현재는 많이 나아졌지만, 부평이 다시금 예전의 활기를 되찾기 위해서는 기업들에게 매력적인 산업 터전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게 현지 기업인들의 지적이다. 조덕형 덕성그린텍 사장은 "과거에 비하면 기업들에 대한 지원이나 관심이 크게 줄어든 것이 사실"이라며 "자동차 산업으로 부평 산업단지가 크게 호황을 맞았지만 많은 기업들이 떠났다"고 말했다. 공단의 노후화도 시급히 고쳐야 할 과제다. 김문수 부평지사장은 "설립된 지 반세기가 가까워 오는데 시설은 여전히 옛날 수준에 머물러 있는 곳이 적지 않다"며 "전 세계 바이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지원시설을 늘리고, 근로자들이 편하게 쉴수 있는 편의공간과 녹지도 늘릴 수 있도록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지은 기자 leezn@<ⓒ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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