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정준영 기자]대법원은 한국전쟁 당시 경찰에 끌려가 사살되거나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진도 국민보도연맹 사건’ 피해자의 유족들에 대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조사 결과만으로는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박병대 대법관)는 16일 유족 7명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소송 상고심에서 “국가는 유족들에게 총 3억 4000여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광주고법으로 돌려보냈다.대법원은 “원심은 필요한 최소한의 증거조사를 전혀 거치지 아니한 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이하 정리위원회)의 조사보고서만을 증거로 피해자에 대한 국가의 불법행위가 있었다고 단정해, 증거재판의 원리와 증명책임의 원칙 및 자유심증주의에 관한 법리를 오해했거나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은 위법이 있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정리위원회의 조사보고서가 유력한 증거자료가 될 것임은 틀림없지만 진실규명 결정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대상자 모두가 국가에 의한 희생자라는 사실이 다툼의 여지 없이 확정돼 그로 인한 국가의 불법행위책임이 반드시 인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대법원 다수의견은 피해자들의 살해 사실에 대해 고도의 개연성 있는 증명이 이뤄졌다 보기 어렵다고 봤다. 다만 이인복, 이상훈, 김용덕, 김소영 대법관은 정리위원회 진실규명결정의 증명력은 매우 높다고 봐야하고 명확한 반증이 없는 이상 그 증명력을 쉽게 부정해선 안된다고 반대의견을 냈다. 대법원은 “과거사 관련 국가의 피해회복조치 의무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하, 과거사정리법)으로 당시 피해 사건의 일괄정리를 추진한 것이므로 법에 의한 진실규명신청을 하지 않은 피해자 및 유족은 추후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과거사정리법 적용대상이라도 진실규명신청조차 하지 않은 경우엔 국가가 소멸시효가 지났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 경우 소멸시효는 민법상 손해배상 청구의 단기소멸시효 기간인 3년이다. 대법원은 또 “정리위원회 진실규명결정을 거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 사건에 관한 위자료 액수를 정함에 있어 피해자 상호간 형평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하고, 희생자 유족의 숫자 등에 따른 적절한 조정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의 경우 피해 발생으로부터 60여년이 지난데다, 피해자의 숫자가 매우 많고 전국적으로 분포되어있는 특수성을 감안해야 한다는 판단이다.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7~9월 진도 등 전남 서남부지역에서 인민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한 경찰은 유엔군의 서울 수복과 더불어 인민군 세력이 퇴각하며 해당 지역을 수복했다. 경찰은 같은해 10월부터 인민군 점령기 부역혐의자를 색출하기 시작해 체포되거나 자수한 주민들을 인근에서 사살하거나 재판을 거쳐 형무소에 수감했다. 그해 10월 곽모씨는 부역 혐의로 경찰에 끌려가 사살됐고, 박모씨는 인민재판 참관을 이유로 11월 경찰에 끌려간 뒤 행방불명됐다. 이후 정리위원회는 곽씨와 박씨를 적법한 절차가 지켜지지 않은 상태에서 사망하거나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진도군 민간인 희생 사건 관련 희생자로 2009년 결정했다. 유족들은 이를 토대로 지난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1·2심은 모두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해 “국가는 유족별로 각 1300~8800여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과거사 관련 국가배상청구소송에 관해 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결정이 갖는 증명력과 한계를 처음으로 명확히 한 것으로 사실인정에 관한 충실한 심리를 촉구한 것”이라고 판결 의의를 설명했다.대법원 관계자는 또 “과거사관련 국가배상청구채권에 대한 국가의 소멸시효완성 주장 허용 여부에 관한 판단 기준을 정리하고, 적정한 위자료 산정을 위한 중요 고려 사항에 대해 대법원의 입장을 밝힌 것”이라며 “향후 과거사관련 국가배상청구소송에 대한 통일적인 심리기준이 정립되고 위자료 산정을 둘러싼 법원별 편차도 완화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덧붙였다. 정준영 기자 foxfury@<ⓒ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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