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박을 터트린 영화를 뒤늦게 본다는 것은 조금은 멋쩍은 일이다.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기분인데다, 주위에 '영화 봤다'는 얘기를 꺼내기도 쑥스럽다. 대종상을 휩쓸고 역대 흥행 3위에 오른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보러갈 때 나의 기분이 그랬다. 100석 정도의 소극장에 자리는 앞에서 두 번째. 스크린이 너무 가까워 눈앞에 꽉 찼다. 사운드는 우렁차고, 주인공 이병헌은 거인처럼 걸어 나왔다. 영화감상의 생명인 몰입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스토리를 대강 알고 있으니,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능히 짐작이 갔다. '앞자리 효과'로 배우들의 몸 사위나 클로즈업된 얼굴이 너무 크고 세밀하게 보이는 것도 문제였다. 급기야 영화의 기승전결보다 배우의 표정, 의상, 무대가 더 들어오기 시작했다. 눈을 사로잡은 것은 1인2역을 맡은 이병헌의 뛰어난 연기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그의 귀였다. 이병헌, 아니 '광해'의 왼쪽 귀 볼 정중앙에 선명한 검은 점 하나. 귀걸이 흔적이 분명했다. 왕이 다가설 때마다 왼쪽 귀를 확인했고 그 곳엔 언제나 귀 뚫은 자국이 선명했다. 최우수 작품상에 빛나는 영화가 조선 왕으로 나온 배우의 귀걸이 흔적을 그대로 놔뒀다니ㆍㆍㆍ. 한 번 트집을 잡으니 못마땅한 장면이 계속 눈에 들어왔다. 광해가 발을 올릴 때마다 '재봉틀'로 박은 바지 밑단이 드러났다. 가짜 왕 하선이 떠나가는 라스트 신도 그랬다. 그가 탄 목선은 대패가 아니라 제재소 전기톱 기계목으로 만든 배였다. 그런 눈으로 영화를 보니 '보름 만에 완벽한 왕으로 변신한 광대'라는 영화적 상상력은 감동보다 황당함으로 다가왔다. 대통령 선거 막바지에 웬 한가한 영화 감상문이냐 타박할지 모르나, 사실은 대선 때문에 꺼낸 얘기다. 많은 사람이 "정치인이 '광해'를 꼭 봤으면 좋겠다"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유력 후보가 영화를 보고 한동안 흐느꼈다고 해서도 아니다. 투표일이 코앞인데도 마음을 정하지 못한 '심란한 유권자'들에게 작은 팁을 주고 싶어서다. 이번 대선은 박근혜, 문재인 후보 간 초박빙의 승부라고 한다. 여론은 깜깜이가 되었다. 당락을 좌우할 캐스팅보트는 누구인가. 아이러니컬하게도 일찍 마음을 굳힌 박, 문 후보의 열렬한 지지자가 아니다. 열쇠는 마지막까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부동층(또는 중도층, 무당파, 전략적 유권자)이 쥐고 있다. 이유는 통계가 말한다. 여론조사 공표가 금지된 지난 13일을 전후해 언론사가 내놓은 여론조사 결과가 근거다. 박근혜ㆍ문재인 두 후보의 합산 지지율은 전체 유권자의 85~92% 수준. 군소후보의 지지율을 감안하면 지지자를 정하지 못한 유권자는 10% 정도다. 여기에 전문가들이 예상하는 투표율 70%를 대입하면 갈등하는 부동표는 7% 안팎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오차범위 내 살얼음판 승부에서 7%는 결정적인 숫자다(지금 쯤 3~4%로 줄었다 해도 그렇다!). 아직도 부동층에 머물러 있다면, '내 한 표가 당락을 가른다'는 자긍심으로 결단할 때다. 스크린이 너무 가까워 혼란스럽고, 귀걸이 같은 디테일에 빠져 영화의 큰 흐름을 놓쳤듯, 그렇게 대선을 보느라 마음이 떠다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유권자에게 권하고 싶다. 거리를 두고 담담히 바라볼 것 - 과열된 편 가르기에 잘못 휩쓸리면 상처만 입는다. 작은 것, 나무보다 숲을 볼 것 - 최선 아니면 차선을, 그리고 꼭 투표한다. (며칠 전 TV에 젊은 날의 이병헌이 나왔다. 오래 전인데도 왼쪽 귀엔 작은 점이 또렷했다. 아, 그것은 귀 뚫은 흔적이 아니라 태생의 그냥 점이다. 내가 만든 마타도어에 내가 빠진 꼴이다. 마타도어는 역시 무섭다. 이병헌, 미안하다.) 박명훈 주필 pmhoon@<ⓒ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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