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웃겨서 보게 됐습니다. KBS <울랄라 부부>에서 나여옥(김정은)의 영혼을 지닌 고수남(신현준)은 말투부터 행동, 표정까지 나여옥 흉내를 넘어 거의 빙의 수준이었으니까요. 신현준의 새침한 표정 한 번 보면 한 시간이 즐겁고, 신현준의 “즈~질” 대사 한 번 들으면 하루가 즐거워요. 그런데 어느 순간 몰입하게 되는 거 있죠? 신현준이 울면 저도 속상하고 신현준이 화를 내면 저도 뒷목을 잡게 돼요. 김정은의 남자연기를 볼 때와는 정말 다른 기분인데 이거 왜 이러는 걸까요? (노고산동에서 박 모양)
처음에 환자분의 배꼽을 잡은 건 디테일이었습니다. 유니폼 주머니에 새침하게 찔러 넣은 오른손, 휴대폰에 자신을 ‘여자’라고 저장해놓은 남편의 무심한 행동 때문에 파르르 떨리는 입술,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반드시 “오호호호홍”이라 소리 내는 웃음, 하다못해 수줍게 올린 곱디고운 속눈썹까지 어딜 봐도 고수남이 아닌 나여옥이죠. 똑같은 호텔 유니폼을 입고 아무 얘기를 안 하고 있어도 얼굴 표정, 아니 새끼손가락의 위치만으로도 이 사람이 지금 고수남인지 나여옥인지 구분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 다음으로 환자분의 무한반복재생 본능을 끄집어낸 건 맛깔스러운 대사였습니다. 스님 말대로 합방을 해보자는 남편의 제안에 이라 받아치고, 호텔 복도에서 당당하게 새우튀김을 먹으며 동료 지배인에게 라고 시식을 권유했죠. 텍스트로 봐서는 웃음기 없는 평범한 대사지만, 신현준의 입을 통과하는 순간 아줌마보다 더 질펀한 말투가 나옵니다. 직접 들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감칠맛이죠.
여기까지는 SBS <시크릿 가든>의 길라임(하지원)과 김주원(현빈)의 영혼체인지를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셨을 거에요. 그런데 왜 어느 순간 몰입하게 되냐고요? 왜 김정은의 고수남 연기를 볼 때와는 다른 기분이냐고요? 그건 신현준이 스킬이 아니라 마음으로 연기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겉으로만 여자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속눈썹 한 올 한 올, 새끼손가락 마디 마디로 지금 이 순간 여자가 느끼는 감정을 표현한 거죠. 우연히 첫사랑 장현우(한재석)를 보고 자석처럼 이끌려 가 안기는 거 보셨잖아요. 키도 크고 덩치도 산만한데 묘하게 보호본능을 일으킨 그 발걸음, 이건 단순히 김정은의 걸음걸이를 관찰한다고 해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내가 내 모습이 아닐 때 그토록 그리워하던 첫사랑을 마주친 여자의 마음을 아는 사람만이 표현할 수 있는 겁니다. 그 때만큼은 코미디가 아니라 멜로였어요. 가끔씩 고수만으로 돌아와서 아내를 토닥여주는 신현준이 정말 멋있어 보이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특히 전생으로 돌아가면 유독 훈훈해지는 고수남 씨, 혹시 전생에 각시탈이었나요? 사유리 만나러 가? 그 여자... 엉덩이 커?<hr/>앓포인트: <u>신현준의 [바보학개론]</u>
기본: 영화 <맨발의 기봉이>의 엄기봉눈을 질끈 감은 채 말을 더듬는 버릇, 웃을 때 아낌없이 드러나는 치아, 대사보다 안면근육으로 승부하는 표현력. 이만하면 전형적인 바보연기다. 영화가 개봉한 지 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신현준의 대표작으로 꼽힐 만큼 임팩트가 강한 작품이었다. 어느 순간 신현준이 엄기봉인지 엄기봉이 신현준인지 모를 단계에 이르러 , 조..조..조..조..좋아!
심화: KBS <각시탈>의 이강산이젠 바보연기를 넘어 바보인 척 하는 연기까지 소화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뒤돌아서 눈 한 번 깜박이면 바로 독립투사 각시탈에서 바보 이강산으로 변신한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라며 집요하게 질문을 던질 땐 언제고 남몰래 동생 이강토(주원)을 바라보던 찰나의 진지한 눈빛은 가히 경이롭기까지 하다. 눈앞에서 어머니가 죽어가는 순간에도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바보행세를 할 수 밖에 없어 울부짖던 그 순간, 신현준은 영구와 맹구에 이어 3대 바보로 등극했다.
응용: SBS <바보엄마>의 최고만결국, 의도하지 않아도 그렇게 보이는 무의식 단계에 접어들었다. 제아무리 천재사업가라고 소개되고 이름까지 ‘최고만’으로 지으면 뭐하나. <바보엄마>를 통해 얻은 별명은 개장수 아저씨인 것을. 제아무리 있어 보이기 위해 뿔테안경을 쓰고 고급스러운 지팡이를 갖고 다니면 뭐하나. 고작 가 되는 것을. “뚜...뚜껑 모...못 열어? 내가 이 집 주인인데 왜 우...우럭 미...미역국 못 먹는데 왜왜? 내 미역국 왜 내가 못 먹는건데?” 천재와 바보는 습자지 한 장 차이라는 말이 맞긴 맞나보다.<10 아시아>와 사전협의 없이 본 기사의 무단 인용이나 도용,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어길 시 민, 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0 아시아 글. 이가온 thirteen@<ⓒ즐거움의 공장 "10 아시아" (10.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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