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스토리]① 김수영, 도봉산에 '풀'로 눕다

산자락의 식당 '외딴집'엔 한국詩의 거장 김수영의 本家가 숨어있다

유족이 공개한 김수영 시인의 사진.

'풀'의 시인 김수영. 그는 서울 토박이다. 그러나 서울 안에서 그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두개의 비석과 표지판 하나가 전부다. 1921년 종로구 관철동 탑골공원 건너편 시사영어사 앞에 '김수영 선생 집터'라고 소개한 비석과 도봉구 도봉동 도봉서원 앞에 놓인 시비(詩碑)다. 시비는 시인이 타계한 이듬해 그를 아끼던 문인들이 도봉산 본가에 세웠다가 지난 1991년 옮겨졌다.  그 외에 '김수영 시인의 본가 자리였다'고 알려주는 30×40cm 크기의 작은 표지판이다. 이 표지판은 도봉산 끝자락, 등산객들이 즐겨 찾는 식당 담장가에 세워져 있다. 식당은 '외딴집'이라는 상호로 닭볶음탕이 주 메뉴다. 외딴집은 도봉역에서 도봉1동 주민센터를 지나 남쪽으로 걷다가 오봉초등학교가 나오기 전 오른쪽길을 따라 걷다보면 나온다. 도보로 20분 남짓 걸린다. 이 식당은 도봉산과 맞닿아 있다. 그가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만 해도 시인의 가족이 양계를 하고 돼지를 기르며 생활하던 곳이다. 1000평 정도의 본가 터는 지금 식당과 공장으로 바꼈다. 37년 전 이곳에 이사 왔던 식당 주인은 "돼지 죽통이 쫙 놓여 있었던 것이 참 인상 깊었다"며 "시인 가족이 시멘트 건물에 슬레이트 지붕이 얹어진 집에 살며 돼지, 닭을 많이 키우고 있었다"고 말했다.

유족이 공개한 사진 중 하나. 김수영 시인이 문인들과 군산으로 강연을 갔을때다 . 맨 아래 왼쪽부터 김수영 시인, 이병기 시조시인, 원형갑 문학평론가, 안도섭 시인. 맨 위 오른쪽은 고은 시인이다.<br />

식당 주인이 이사온 때는 시인이 타계한 1968년 이후였다. 그때까지도 형제들이 그곳에서 가축을 기르며 생활했다. 시인의 형제들은 20여년을 이곳에서 지내다가 다른 곳으로 각각 흩어졌다. 도봉산 골짜기 본가 터는 여전히 여느 시골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널찍한 마당에 뒤로는 숲이 울창하다. 시인이 타계한 후 시비가 처음 있던 장소이기도 하다. ◇ 도봉구의 복원작업=그가 태어난 이듬해 종로6가로 이주해 열 네살까지 살았다. 사실상 생가인 셈이다. 그러나 생가는 시인의 생애만큼이나 불우한 운명을 맞았다. 지난 2004년 겨울 폭설로 무너졌다. 지금은 공터로 남아 있다. 그외에 충무로, 돈암동, 성북동, 마포 구수동, 도봉동 등을 전전하며 생활을 이어갔지만 그를 기억할만한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그렇게 그는 민초처럼 흔한 풀잎으로 살다가 풀잎으로 스러졌다. 시인의 위대한 문학적 향기에 비해 흔적은 비루할 지경이다. 그런 시인의 삶이 한곳으로 모아진다. 도봉구와 문학계가 방학3동 문화센터 건물 1~2층에 만들고 있는 자료관이다. 자료관이라고 해봐야 이미 세워진 건물 내에 관련 자료와 사진들이 조촐하게 비치하는 수준이다. 시인의 육필 원고, 저서, 김수영론 관련 자료, 시인의 작품이 포함된 서적과 김수영 문학상 관련 자료, 시인의 애장도서나 애장품 등 유물들을 만날 수 있게 된다. 아쉬운대로 시인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도 하다. 자료관 건립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시작됐다. 지금 유족들은 시인이 남긴 자료정리에 한창이다. 도봉구청과 김수영 시 전집을 발간한 민음사, 유족 대표, 문인들이 추진위 구성을 논의중이다.도봉구청 문화관광과 관계자는 "도봉산에 유골이 안장돼 있고 시비가 세워져 있을 뿐 아니라 가족들이 살았던 본가 자리가 바로 도봉구에 있어 추진하게 된 것"이라면서 "유족들이 합심해 자료관 조성에 힘을 쏟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15일 고(故) 김수영 시인 타계 44주기를 기념해 도봉서원 앞 김수영 시비에 모여 문인들이 시 낭송회를 열었다. 왼쪽에서 앞줄 세번째가 최동호 고려대 교수.

최동호 고려대교수(시사랑문화인협의회 회장)는 "지방 문인들에 비해 서울의 작고 시인들이 상대적으로 더 소외를 받고 있다. 문학관 하나 제대로 세우기가 힘들다"면서 "도시가 클수록 작가도 많고 땅값도 비싸서다. 20세기 후반 한국현대시를 대표하는 시인 김수영 자료관 건립은 너무 늦은 감이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아직 시인의 집터나 생가에 대한 복원은 꿈도 꾸지 못 한다. 그나마 지료관이 도봉구에 생기는 정도로 감격할 지경이니 서울이라는 도시가 작가, 예술인의 삶을 어떻게 인멸해갔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시인의 문학적 성취에 비해 지나치게 홀대했다. 어쩌면 시인의 인생유전은 그에게 벌어졌던 게 아니라 바로 우리들이 만든 결과인지도 모른다. 이로 인해 문화유산을 축적하고 관리하는 우리의 인문적 밑천이 드러나는 듯 해 씁쓸한 대목이기도 하다.  ◇ 그는 도봉 사람인가=도봉에서의 삶은 가족과 여러 시인들을 통해 다양하게 전해진다. 그가 도봉과의 인연은 30대 후반이다. 본가가 바로 도봉으로 이주하면서부터다. 당시 시인과 아내는 마포구 구수동에서 닭, 돼지를 길렀던 경험을 살려 본가에서도 양계를 했다. 형편이 어려운 가족들을 위해서였다. 도봉엔 아버지와 사별하고 혼자 남은 어머니와 동생들이 살았다. "(시인은) 글과 양계를 위해 태어났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1956,7년 무렵인데 하루는 형이 '나 오막살이 방 하나 지어줄 수 없겠니' 하더라. 부탁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여서 오죽하면 그러랴 싶었다. 양계장에서 좀 떨어진 서쪽 끝에다 방을 하나 지어드렸다."

도봉산 자락에 있는 김수영 시인 옛 본가. 현재는 식당과 공장으로 바뀌었다.

도봉과 구수동을 오가며 양계와 창작에 몰두하던 모습을 시인의 남동생은 이렇게 회고한다. 최하림이 쓴 '김수영 평전'에 나오기도 한다. 시인은 선산이 있고 어머니의 농장이 있는 도봉산 골짜기를 무척 좋아했다. 도봉은 그렇게 시인의 삶과 문학 심지어는 유골마저 품어줬다. 그의 육필시집과 자료를 꼼꼼히 모아온 여동생 김수명 여사는 "도봉구 본가에 자주 들러 어머니를 돌보고 양계도 하면서 조용히 시를 썼다"고 회고했다. 김 여사는 지금도 시인을 어린이든 지게꾼이든 어떤 상대라도 거리낌 없이 대화하고 불의에는 크게 분노하는 이로 기억한다. 모두 시인과 누이가 도봉에서 함께 산 기억들이다.도봉은 그의 문학산실이다. 어릴 적부터 형제들과도 이야기를 별로 나누지 않고 방안에서 책장을 넘기며 놀기를 좋아했던 것처럼 수많은 시들이 이곳에서 쓰여졌다. 시인은 일본 도쿄에서 연출공부를 할 때와 일제 말기 만주 길림, 6ㆍ25전쟁 당시 거제 수용소를 거친 젊은 시절을 빼놓고는 줄곧 서울에서 살았다. 시인은 서울의 여러 곳을 전전하다 도봉에 이르러서야 유랑의 더운 피가 멎었다. 그래서 그는 도봉의 시인이 됐다. 양계장과 도봉과 문학이 하나였듯이 시인의 삶에 대한 애착, 가족 사랑, 문학적 성취가 도봉에 깃들여 있다.

시인이 태어나서 얼마지나지 않아 이사간 곳은 종로구 관철동 58-1번지다. 현재 종로 6가 43-4호로 바뀌었다. 시인의 집터는 공터로 남아있다.(왼쪽 사진) 또 시인이 전쟁 이후 아내와 재회하고 정착한 곳이 마포구 구수동이다. 1955년부터 시인이 교통사고로 타계한 1968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현재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오른쪽 사진)

한편 최근 시인 김수영을 회고하고 기리는 행사가 이어졌다. 지난 4월 '김수영 사전'이 편찬됐고, 이에 맞춰 15일 타계 44주기를 맞아 추모형식의 시 낭송회가 마련됐다. 사후 첫 '김수영 시 낭송회'였다. 이를 주도한 최 교수는 "20세기 전반 한국현대시를 대표하는 시인 정지용, 20세기 후반 중심적인 시인은 바로 김수영"이라며 "1960년대 김수영이 없었다면 1970년대 김지하나 1980년대 신경림의 민중시를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사전을 만들어 오면서 '부정', '비판'의 정신을 시로 발현한 것으로 알려진 김수영 시인이 '긍정'과 '사랑'의 시인이었다고 재해석했다. 최 교수는 "현실을 부정적으로,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도 사랑과 긍정에 도달하는 인식과정을 그의 어휘구사에서 살펴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오진희 기자 valere@<ⓒ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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