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민진 기자] #인천의 한 가구회사에 근무하는 박강호(44) 씨는 요즘 노후문제로 고민이 많다. "은퇴자금으로 10억원 정도는 필요하다"거나 "100세 시대가 재앙이다"라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꼭 내 이야기 같아 가슴이 철렁한다. 아직 은퇴를 생각하기에 이른 나이지만 40대 중반 들어서야 겨우 작은 아파트 한 채를 마련했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자녀를 생각하면 한숨부터 나온다. 중소기업에 다니며 결혼 12년 동안 모은 돈 3억원은 내집 마련에 쏟았다. 앞으로 교육비나 생활비 지출이 늘게 뻔한 상황에서 박씨에게 10억원이라는 은퇴자금은 꿈 같은 소리다. #대기업에 근무하다 지난해 정부 산하 유관기관 간부로 자리를 옮긴 이경주(52ㆍ가명) 씨는 직장을 옮긴 후 일할 맛을 잃었다. 자리를 옮기며 연봉이 30% 가량 줄었고 판공비마저 쓸 수 없게 되자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됐다. 지금 다니는 직장은 공기업으로 60세 정년이라는 게 매력적이지만 대기업 임원으로 고액연봉을 받는 대학 동기들을 보면 부러운 마음을 떨칠 수 없다. 이 씨의 경우는 평범한 직장인들보다 나은 처지다. 하지만 은퇴 후 뭘 해야 할 지도 모르겠고 무료하게 20~30년 이상을 지낼 본인의 처지를 생각하면 서글퍼지기도 한다. 40~50대 직장인들의 은퇴 불안감이 극에 달했다. 직장에서 운좋게 정년을 채운다해도 수십 년 동안 뭘 하고 지내야 할 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모아둔 재산이나 변변한 일자리가 없는 경우에는 은퇴라는 말 자체가 무색하다. 당장 생활비 마련도 힘든 처지에서 은퇴자금이니, 생애설계니 하는 소리는 사치로만 들릴뿐이다. 전영수 한양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는 은퇴를 '갈림길'로 정의했다. 청장년 시절 사회적 성공이나 생계를 위해 한길로만 걸어왔다면 노년에 접어들며 또 다른 길을 걷는 선택이 필요한 시기라는 것이다. 전기보 행복한은퇴연구소 소장은 은퇴를 '새로운 출발'이라 불렀다. 지금까지의 인생이 가족을 위한 생활이었다면 은퇴 후 삶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고 바라는 새 영역으로 여행을 시작하는 시작단계라는 뜻에서다. 우재룡 삼성생명 은퇴연구소장 역시 '리타이어(retire)', 영어 뜻 그대로 '타이어를 갈아끼우고 다시 달린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다지 녹록치 않은 게 현실이다. 우리 사회에서 은퇴 불안감이 높아진 것은 지나치게 위기감을 조성하는 사회분위기 때문이기도 하다. 불과 20~30년전만 하더라도 평균수명이 60~70세에 불과했고 비교적 직장에서의 정년도 잘 지켜졌다. 직장인들의 경우 정년퇴직 후 모아놓은 돈과 퇴직금으로 10~20년을 보냈고, 부모 부양이라는 전통적인 가족관도 안전판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한 세대만에 기대수명이 크게 늘고 정년의 개념, 가족관 등이 바뀌면서 불안감이 높아졌다. 여기에 매스컴이나 금융회사가 기름을 끼얹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전기보 소장은 "금융사들이 마케팅을 위해 위기감을 조성하면서 은퇴에 대해 오판하고 은퇴준비를 포기하게 만드는 게 현실"이라며 "왕성한 경제활동을 하는 시기에 준비한 돈을 은퇴 후 쓰다가 죽는다는 식의 접근방식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은퇴 패러다임 자체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 소장은 "은퇴전문가는 많지만 대부분 '돈' 중심의 문제제기만 하고 있다"며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인문학적 관점에서 은퇴 문제를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명룡 대한은퇴자협회장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주 회장은 "금융계나 보험계의 생태적 마케팅 상술에 젊은 세대들의 불안감이 지나치게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연금이나 노령연금 등 과거에 비해 사회복지가 개선되고 있어 풍족하지는 않지만 비교적 품위 있게 늙어갈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는 게 주 회장의 설명이다. 우재룡 소장은 재무적 준비와 비재무적인 측면이 잘 결합된 은퇴 준비가 이상적이라고 조언했다. 노후에 필요한 생활비와 의료비가 마련된 상태에서 가족관계나 사회활동, 취미ㆍ여가, 건강 등이 잘 어우러져야 한다고 했다. 우 소장은 "우리 사회에서 은퇴 문제가 지나치게 재무적인 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균형을 강조했다. 은퇴와 관련한 정책적인 우선순위는 대체로 정년연장이나 은퇴생활에 적응할 수 있는 직무교육 등이 필요한 것으로 꼽혔다. 기대수명이 늘어난 만큼 수명이 낮았던 시대 만들어졌던 정년이 높아져 일자리의 안정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우재룡 소장은 "정부가 모든 것을 다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민간 차원에서 은퇴준비가 활발하게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구조적인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했고 전기보 소장은 "50대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 지 생애설계를 만들 수 있는 고민이 필요하다"고 했다.김민진 기자 asiakmj@<ⓒ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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