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괜찮아요.” 툭 하고 말이 떨어진다. SBS <뿌리깊은 나무>의 백정 가리온과 비밀결사 밀본의 3대 본원 정기준 사이를 오가면서 보여준 극과 극의 연기가 힘들지는 않은지를 묻는 말에서였다. 시작부터 1인 2역의 ‘재밌는 대본’임을 알았고, “대본에 쓰인 대로 연기했을 뿐”이었던 이 배우는 그렇게 자신을 포장하지 않는, 그래서 감정의 파고가 여간해선 느껴지지 않는 말투로 대답했다. 조금은 무심하게도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는, 하지만 ‘재밌는 일’이 무엇인지 얘기하는 순간 찰랑거리는 감정의 파고를 드러낸다. “안석환 선배님(이신적 역)은 제가 정기준인지 몰랐어요. 촬영장에서 ‘누가 정기준이냐’는 얘기 나오면 뒤에서 ‘난데’라고 혼자 말하곤 했었어요.” 으하하 웃으며 한석규, 장혁, 신세경, 그리고 작가와 감독을 제외하고 정기준의 정체를 알지 못했을 때부터 이미 ‘연기 속의 연기’를 하고 있었음을 밝힌다. “완벽하게 감추려고 정기준과 가리온이 보여주는 성격부터 큰 차이를 뒀어요. 그래서 가리온은 과장해서 웃고, 막 연기했죠.”어려서부터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벌기” 위해 부딪혔던 치열했던 시간이 지나서일까, ‘재밌는 일’과 ‘재미 없는 일’의 경계가 분명하다. 재밌어서 시작했다는 클래식 기타 역시 마찬가지다. 이생강 선생의 공연 무대에 오를 만큼 실력을 쌓은 대금은 흥미가 떨어져서 오래 하지 않았지만, 기타 연주만큼은 술자리에서 술에 취했을 때 들려주고, 그때마다 “꼭 한명씩” 울게 한다. 그래서 그가 술 한잔할 때 듣고 싶다고 밝히는 다음의 음악들 역시 배우 윤제문의 마음속을 일렁이게 하는 파문들일지 모르겠다. <hr/>
1. 김광석의 <김광석 네 번째>“예전에 연극을 하면서 자주 불렀던 노래에요.” 김광석을 유독 좋아한다는 윤제문이 가장 먼저 추천하는 노래는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다. 윤제문은 MBC <놀러와>에 출연했을 때 유재석의 질문에 단답형으로 대답했지만, 이 노래를 통기타로 연주하면서 노래할 때만큼은 예능의 어색함을 떨쳐버린 모습이었다. 쓸쓸한 기타 선율보다 더 쓸쓸한 김광석의 목소리가 ‘그대 떠나보내고 돌아와 술잔 앞에 앉으면 눈물 나누나’라고 내뱉으면, 날카로운 기억이 하나씩 위로를 받는다. SBS <시크릿 가든>에서는 길라임(하지원)과 김주원(현빈)이 나란히 누워 눈을 맞췄을 때, 액션스쿨 선배(장서원)가 부르는 이 노래가 배경음악으로 삽입됐다. 사랑의 시작됨을 느끼는 순간, 이별을 가늠해야 했던 길라임과 김주원의 상황을 김광석의 노래가 대신해 아픈 사랑을 위로한 셈이다. 김광석이 떠난 지 15년이 지났지만, 누군가의 이별과 아픔을 어루만지며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2. 이정선의 <30대>“연극 <청춘예찬>을 공연할 때 이정선의 ‘행복하여라’를 부르는 장면이 있었어요. 이후에 이정선 씨의 노래를 듣다 보니까 ‘우연히’라는 좋은 노래가 있더라고요.” 윤제문이 추천하는 ‘우연히’는 1987년 발매된 앨범 <30대>의 수록곡이지만 지금은 통 구하기 어려운 희귀음반이 되었다. 해바라기와 신촌블루스에서 포크와 블루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이정선은 ‘산사람’, ‘섬소년’, ‘오늘 같은 밤’ 등을 만든 기타리스트이자 가수. 그리고 포크송을 섭렵하게 만들었던 ‘통기타 교본의 교과서’, <이정선 기타교실>의 저자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MBC <우리들의 일밤> ‘나는 가수다’에 출연한 박정현이 이 곡을 록으로 편곡해 불렀다. 처음 듣는 노래일지라도 ‘우연히 그대를 본 순간~’이란 구절을 반복하게 하는 쉬운 멜로디는 ‘우연히’에 금세 스며들 수 있게 한다.
3. 바비 킴의 < Heart & Soul >“요즘 굉장히 많이 듣는 곡이에요”라며 윤제문이 추천한 노래는 ‘친구여’다. 작년에 발표한 바비 킴의 3집 < Heart & Soul >에 수록된 곡. 이 앨범은 여느 앨범보다 바비 킴의 다양한 색깔을 만나볼 수 있게 했다. R&B부터 록까지 장르를 편식하지 않으면서도 노래에 자신의 색깔을 담으려고 했던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집 앨범에서 바비 킴과 강산에가 각각 작곡과 작사를 맡아 함께 불렀던 ‘친구여’는 록과 스카 리듬 등이 혼합돼 독특한 분위기를 내는 곡이다. 특히 ‘저 언덕 위의 큰 나무가 되어 준 내 친구여’라는 가사 자체는 잊고 지낸 우정을 떠올리게 한다. 툭툭 던지는 바비 킴의 창법과 자유로운 바람 같은 강산에의 창법은 서로 친구로 지내기 전 어색함이 감도는 첫 만남 같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친근하고 오래된 친구처럼 편안해지는 곡이다.
4. 강산에의 < Vol. 4 - 하루아침 >“강산에 씨의 노래를 좋아하는데, 음악영화인 <위험한 흥분>을 촬영할 때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나서 형, 동생 하기로 했어요”라며 강산에의 ‘물 좀 주소’를 추천한다. ‘물 좀 주소’는 강산에 < Vol. 4 - 하루아침 >에 수록된 곡으로, DJ 달파란과 하찌가 프로듀싱을 맡았다. 새로운 일렉트로닉 사운드와 ‘강산에스러움’이 공존하는 그야말로 기이한 앨범. ‘갑돌이와 갑순이’,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쾌지나 칭칭나네’ 등의 노래가 일렉트로닉으로 리메이크됐다. 그 중 ‘물 좀 주소’는 1974년에 발표한 한대수의 1집 앨범 <멀고 먼 길>에 수록된 곡으로 당시 한대수의 거친 음색은 대중음악계에 파장을 일으켰다. 곡의 소재가 ‘물’임에도 뜨거움이 느껴지는 ‘물 좀 주소’가 시대적 갈망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곡으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금지곡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후에도 갤럭시 익스프레스, 어어부 프로젝트 등 많은 인디밴드의 리메이크 곡으로 다시 태어난 것은 시대가 지나도 해소되지 않는 갈증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5. 송창식의 <송창식 16>“철 지난 바닷가를 혼자 걷는다~” 열 마디의 설명보다 직접 부르는 노래 한 구절이 모든 것을 말하는 곡이 있다. 부르는 사람에 따라 쓸쓸함이 강조될 수도,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는 노래로 만들 수 있는 곡이 ‘철 지난 바닷가’다. 윤제문이 부른 송창식의 ‘철 지난 바닷가’는 늦가을을 연상시키는 기타 선율에 깊은 울림을 주는 목소리가 얹어져 아련한 옛사랑을 떠올리게 한다. 이 곡이 수록된 <송창식 16>에는 유독 ‘비’에 관련된 노래가 많다. 송창식이 작사, 작곡한 ‘창밖에는 비 오고요’, ‘비의 나그네’, ‘비와 나’ 등에서 말하는 ‘비’는 님이 오시는 신호이기도 한 동시에, 떠나간 사람을 그립게 만드는 매개체가 된다. 유독 자연을 소재로 노래하는 송창식 때문일까. 그의 노래는 가슴 한구석에 묻어 놓았던 추억의 장소로 우리를 부른다. 을왕리에서 조개구이에 소주 한 잔을 하며 이 노래를 듣는 윤제문처럼. <hr/>
재밌는 것과 재미없는 것이 명확한 윤제문에게 연극을 하기로 결정한 것도 음악을 할 때만큼 충동적이었을지 모른다. “<칠수와 만수>로 연극을 처음 접했는데, 침이 고일 정도로 몰입해서 봤어요. ‘이거다!’라고 생각했죠. 연출 스태프로 극단생활을 시작했는데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너무 재밌는 거야!” 술과 사람들이 좋아 시작했지만, “힘들지만 재밌어서” 지금까지 연기를 한다. 그리고 그 재밌는 연기를 더 잘하기 위해 그는 다시 차분한 시선으로 자신을 돌아본다. “정윤암에서 밀본의 계원들을 모아놓고 했던 연설 장면이 아쉬워요. 정기준의 정당성을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이었는데 날은 춥고, 빨리 찍으려다 보니까 너무 못했어요”라며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움츠러들진 않는다. “금방 까먹으니까 괜찮아요. 잠깐 반성할 뿐이지 계속 끌고 가진 않거든요. 다음에 잘하면 되지 뭐.” ‘다음’을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일렁인다. <10 아시아>와 사전협의 없이 본 기사의 무단 인용이나 도용,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어길 시민, 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10 아시아 글. 박소정 기자 nineteen@<ⓒ즐거움의 공장 "10 아시아" (10.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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