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산책]SC·씨티·론스타에 대한 상념

SC제일은행의 파업이 시작된 건 지난달 27일이다. 오늘이 15일이니까 날짜로는 19일째, 은행이 문을 여는 영업일 기준으로 15일째 파업이 이어지고 있다. 이로써 국내 은행업계에는 신기록이 하나 탄생했다. 오늘 기준으로 이른바 '은행권 최장 총파업' 기록이 깨진 것인데 종전 보유자는 한국씨티은행이다. 정확히 하면 옛 한미은행이 7년 전인 2004년 9월 힘겹게 세운 기록이다. 당시 한미은행 노조는 씨티은행에 흡수, 합병되는 것에 반대하며 18일간(영업일 기준 14일간) 파업을 벌였다. 여담이지만 한미은행 노조는 한때 잘나가던 시절 은행장을 포함한 전체 임원을 대상으로 인기투표를 한 뒤 그 결과를 언론에 배포하는 등 은행가에서 명성이 자자한 '강골'이었다. 은행 직원들에게 무기명으로 '좋은 상사'와 '나쁜 상사'를 찍게 한 뒤 한 줄로 세워놓고, 그 서열과 득표수를 공개해서 망신 주는 식으로 위세를 떨친 것이다. ("그러니 망했지"라고 말하는 독한 사람도 있고, 은행판 '나가수'의 원조라고 칭송하는 이도 있지만, 한미은행이 이 땅에서 사라진 걸 안타깝게 여겨 은행 거래를 중단한 충성파는 아직 못 만났다. 혹 이 글을 읽고 뒤늦게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르겠다. "한미은행이 씨티은행에 합병된 그날 은행에서 돈을 몽땅 인출해서 장독에 넣거나 땅에 묻어놓고 필요할 때마다 한 장씩 빼쓰고 있노라"며.)  어쨌든 모든 기록은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까 SC제일이 아니었더라도 누군가는 한국씨티를 깼을 것이다. 그러니 아쉬워할 이유는 하등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기록 경신을 예감했던지 며칠 전 리처드 힐 SC제일 은행장이 각 신문에 '고객님께 드리는 글'이란 광고를 게재했다. 요약하면 이렇다. "고객에게 불편과 우려를 끼쳐 매우 죄송하게 생각한다. 노조와의 갈등을 조속히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국내에서 장기적 관점으로 서비스 개선 등을 위한 투자를 지속할 것을 알려드린다."(버전은 약간 다른데 홈페이지에도 팝업으로 떠 있으니 확인해 보시라.) 고객 돈으로 장사해서 수익이 나면 꼬박꼬박 주주에게 배당하고 직원 월급 올리고, 반대로 적자가 쌓일 대로 쌓이면 공적자금 받아 연명하는 게 은행이고 보면 노측이든 사측이든 '죄송'은 당연한 일이고.  흥미로운 건 광고 내용에 포함된 다음과 같은 표현이다.  "SC제일은행은 82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제일은행과, 150년 이상의 역사와 함께 70여개국에 진출하여 영업을 영위하는 스탠다드차타드 금융그룹이 결합된 건실한 은행"이라는. 처음에는 무심코 넘겼지만 다시 읽어보니 뭔가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 듯하다. 특히 '유구한 82년'과 '150년 역사와 70여개국'의 대비가 자못 묘하다.  '1929년 조선저축은행이란 이름으로 식민지에서 출발한 제일은행과 1853년 역시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시작된 은행이 합쳐져 건실한 은행이 됐다는 얘기인데…. 은행의 대주주는 일본도 한국도 인도도 아닌 영국이고….' 상념의 진도가 이쯤에 도달한 순간, 퍼뜩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혹시 한 50년 지나면 우리ㆍKBㆍ신한ㆍ하나금융도 중국이나 동남아 어디에서 유사한 내용의 광고를 현지 언론에 게재하지 않을까? 그러려면 지금 SC제일이나 한국씨티, 또는 외환은행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하고 꼼꼼하게 살펴둬야 하는 게 아닐까?  '선진금융의 앞선 노하우'를 배우자며 씨티를, SC를, 그리고 론스타까지 불러들여놓고 이제 와서 살짝 국수주의로 돌아앉아 모른 척 앉아만 계신 게 바로 여러분 아닌가? 물론 나까지 포함해서.<a href="//www.asiae.co.kr/news/opinion_list.htm?sec=opi2&opid=column20" target="_blank">☞ 박종인의 당신과 함께 하는 충무로산책 보기 박종인 부장 ain@<ⓒ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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