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명석기자
박정희 대통령 부인인 육영수 여사(가운데)가 1974년 6월 28일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에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변중석 여사(왼쪽에서 첫번째, 두번째)가 지켜보는 가운데 현대중공업이 첫 건조한 유조선에 '애틀랜틱 배런'을 명명하고 있다.
[아시아경제 채명석 기자] ‘내가 그이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김춘수 시인의 시 ‘꽃’의 일부다. 여기서 그를 그녀로, 몸짓을 철구조물로 시어를 바꾸면, ‘그녀(선박)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녀는 다만 하나의 철구조물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녀는 나에게로 와서 꽃(배)이 되었다.’김춘수 시인은 ‘꽃’에서 이름 불러주기를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이와 똑같이 선박을 명명하는 것도 철구조물에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는 아주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다.수년에 걸쳐 완공된 선박은 이름을 붙여줌으로써 비로소 탄생하게 된다. 그만큼 선박건조의 마지막 단계에 행해지는 명명식은 아주 중요한 과정이라 할 수 있다.선박의 명칭에는 유래가 있다. 즉, 선박을 발주한 선주사들은 국가나 선종, 항로 등을 고려해 선박의 이름을 짓는데, 선주사마다 선호하는 이름이 있거나 뚜렷한 작명 경향이 있다. 선명은 크게 꽃, 동물, 그리스 로마신화의 여신, 추상명사, 보석, 행성 및 별자리 등 천문용어, 작위(직함), 산이나 강, 지명(항로), 숫자, 여자 이름 등으로 나눠진다.한진해운이 지난 2009년 1월 29일 삼성중공업 거제 조선소에서 명명식을 거행한 최첨단 선박 한진 그디니아와 한진 애틀랜타호
신화 속의 여신도 배 이름으로 종종 등장한다. 유독 여신 이름만 사용하는 것은 배가 여성에 비유되는 또 다른 이유다. 노르웨이 라이프 훼그(Lief Hoegh)는 로마신화의 운명의 여신인 ‘포르투나(Fortua)’를, 미국 OSG는 불과 부엌의 여신 ‘베스타(Vesta, 그리스신화의 헤스티아)’, 미와 사랑의 여신 ‘비너스(Venus, 그리스신화의 아프로디테)’ 등을 배이름으로 선정했다.영희, 순희 같은 흔한 여자이름이 배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리스 리바노스의 ‘마리나(Marina)’, 독일 아쿠아리스의 ‘이자벨라(Isabella)’, ‘에러벨라(Arabella)’, ‘마리벨라(Maribella)’, OSG의 ‘루시(Lucy)’, ‘마틸다(Matilde)’ 등이 그렇다.◆OSG는 천문용어 선호해= 현대중공업의 최대 고객사중 하나인 OSG는 다른 해운사들과 달리 까다로운 천문용어를 이용해 ‘특별한 이름’을 짓는 선사로 유명하다. 지난 1980년 현대중공업에 처음으로 발주한 벌크선을 ‘토성(Saturn)’으로 명한 이후 ‘명왕성(Pluto)’, ‘해왕성(Neptune, 로마신화에서 바다의 신을 의미)’, ‘천왕성(Uranus)’ 등 행성 이름을 따기도 했으며, ‘직녀성(Vega)’, ‘카노푸스(Canopus, 용골자리의 일등성)’ 등의 별자리를 비롯해 ‘자오선(Meridian)’, ‘춘·추분 분점(Equinox)’ 등 다소 어려운 천문용어를 이용했다.또한 OSG는 이탈리아 태생의 미국 오케스트라 지휘자인 토스카니니(Toscanni)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이탈리아 3대 천재 예술가로 꼽히는 ‘라파엘(Raphael)’을 선명으로 택했다. 선박 명칭을 결정하는 오너가 이탈리아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현대중공업 명명식
◆거대한 배에 벌(Bee) 이름을= 배 이름에는 꽃을 비롯한 식물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동물이 등장하기도 한다.콩알보다 작은 벌(Bee)에서부터 커다란 곰(Bear)까지 크기와 종류는 다양하다. 커다란 배에벌이라니 아이러니하다. 부산-후쿠오카를 오가는 한일 쾌속선 이름이 ‘비틀’(Beetle, 딱정벌레)인 것을 감안해보면 배 이름과 곤충 이름도 ‘어울릴 것 같지 않음’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하다.현대중공업이 칠레 오델로 쉬핑에 1977년에 인도한 액화석유가스(LPG) 저장선 이름은 ‘행복한 벌(Happy Bee)’인데, 선종을 고려해 볼 때 환경(자연)친화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도 추측된다.싱가포르 탱커 퍼시픽은 ‘매(Falcon)’, ‘독수리(Eagle)’, ‘매(Hawk)’ 등 조류 중에서도 힘세고 빠르기로 유명한 독소리과나 매과 새의 이름을 따기도 했다. 뭐니뭐니해도 동물의 왕은 사자(Lion)다. 사자는 OSG를 비롯 다양한 선주사의 선명에 등장했으며, 영국 보아는 ‘스프링 베어(Spring Bear)’라는 이름으로 따뜻한 봄날의 곰을 연상시켰다. 이밖에 ‘꿩(Pheasant)’, ‘솜털오리(Eider)’나 ‘수달(Otter)’ 등이 등장하기도 했다.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해운사들도 선사 마다 선박을 짓는데 있어 차별점이 보인다.현대상선은 초기에 숫자를 넣은 배 이름을 지었다. ‘현대1호’, ‘현대2호’, ‘아시아 1호’, ‘아시아 2호’하는 식이다. 적어도 20여년을 운항하는 배에 붙이는 이름치고는 너무 즉흥적이고 단순했다. 현대상선은 한동안 이렇게 숫자로 배 이름을 짓다가 이후에는 대체로 도전, 웅장, 대륙 등 중후장대한 그룹의 이미지를 담은 이름을 사용했다. ‘도전자(Challenger)’, ‘탐험·개척가(Explorer)’, ‘개척자(Pioneer)’등이 그 이름이다.현대상선이 1996년 5월 말부터 인도한 컨테이너선 7척은 항로의 특성에 맞춰 이름을 지었는데, 이 배들이 운항할 미주항로를 상징하는 ‘독립(Independence)’, ‘자유(Liberty)’, ‘발견(Discovery)’, ‘자유(Freedom)’등이 그렇다.(왼쪽부터) 테드 페트론 나비오스 그룹 사장, 정홍준 성동조선해양 회장, 안젤리키 프란고우 나비오스 마리타임 회장, 김영민 한진해운 사장과 부인 김상미 여사가 지난해 10월 20일 열린 선박 명명식에 참석해 박수치고 있다.
작위나 직업과 관련된 용어 중 아주 특이한 것도 발견된다. 네덜란드 P&O 네들로이드의 ‘P&O 네들로이드 쿡(P&O Nedlloyd Cook)’에서 Cook은 요리사란 뜻이며, 노르웨이 BBSL은 1984년 두 척의 로로선을 인도해 갔는데 두 선박의 이름은 ‘바버 탬파(Baber Tampa)', ‘바버 텍사스(Barber Texas)’로 모두 이발사(Barber)로 시작한다. 용맹성을 표현하기 위해 때론 호전적인 단어를 쓰기도 한다. ‘전사(Warrior)’, ‘검투사(Gladiator)’, ‘사냥꾼(Hunter)’, ‘싸우는 자(Fighter)’, ‘헥터(Hector, 트로이전쟁에 나오는 용사)’, ‘거인(Giant)’등이 그 예다.상선은 최대한 물량을 많이 싣고 이윤을 많이 남겨야 한다. 즉 만선(Full Road)이 중요하단 말이다. 만선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그리스 세레스는 다산, 비옥함을 뜻하는 ‘퍼틸리티(Fertility)’, 중국 시노트랜스(Cinotrans)는 수확을 뜻하는 ‘하비스트(Harvest)’란 단어를 선명으로 택했다.이렇듯 건조, 인도된 선박을 보면 뚜렷한 작명 경향이 나타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름을 잘 지어야 운도 트이고 출세한다는 말은 비단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선주사의 염원이나 뜻을 담은 하나의 의미를 가진 이름을 달고 처녀출항을 하는 선박들이 때문에 명명식이 거행되면 선박들의 이름을 관심있게 보는 것도 재미거리다.<자료: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STX조선해양·한진중공업·성동조선해양>채명석 기자 oricms@<ⓒ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