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고경석 기자]개그맨도 아닌데 어떤 영화감독에게는 유행어가 있다. 영화 속 대사인데 배우나 캐릭터보다 감독의 정서와 더 밀착해 있으면 그것이 감독의 유행어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여기엔 물음표가 없다. 그래서 영화 '봄날은 간다'를 관통하는 명대사가 됐고 허진호 감독의 유행어가 됐다. 8년째 영화 대사 유행어 순위(가 있다면) 상위권을 지키고 있을 법한 이 문장을 허진호 감독 스스로 뒤집었다. 허진호 감독의 새 영화 '호우시절'은 사랑이 아직도 그대로인 사람들의 이야기다. 정확히 말하면 오래 전 사랑인 줄 모르고 헤어졌다가 이제야 사랑임을 알게 된 남녀의 에피소드다. 과거 허진호 감독의 영화 속 연인들은 모두 슬펐다. 대부분 헤어지거나 불분명한 결말로 끝이 났다. 그에 반해 '호우시절'은 차분하면서도 밝고 희망적이다. 확실히 변했다. "가슴 셀레고 따뜻하며 행복한 이야기를 생각했습니다. 이전엔 좀 더 슬프고 어두우며 가슴 아픈 감정들이 영화에 많이 들어갔다면 이번에는 반대지요. 이유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그게 더 좋아진 것 같습니다. 살면서 그런 부분들을 보여주는 게 더 즐거운 것 같습니다."이 영화의 주연배우 정우성은 "허진호 감독에게 아기가 생겨서 그렇다"고 농담처럼 말했지만 허 감독은 "아기를 바라본다는 것이 매우 행복한 일이니 아마도 그런 부분이 있을 것 같다"고 부분적으로 긍정했다. 여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호우시절'이 애초에 청두가 위치한 쓰촨성 대지진을 소재로 한 옴니버스에서 출발했다는 제작 배경이 그것이다."이 영화를 시작하면서부터 지진참사라는 상처를 지닌 도시 청두에서 뭔가 희망적이고 밝게 끝나는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공간의 밝음을 보여주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영화를 찍기 전 청두에서 만난 문인들도 지진 장면을 넣지 않기를 바라더군요. 제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리해서 깊게 다가가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곳에 사는 분들의 상처를 직접적으로 건드리지 않으면서 희망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옴니버스 중 한 편의 제의를 받고 중국 청두로 건너간 허 감독은 장편으로 계획을 수정하고 중국 제작사의 동의를 얻어 촬영에 들어갔다. 한 숏(컷)을 찍는 데 있어서 촬영을 여러 차례 반복했던 예전 방식을 바꾸고, 숏의 길이를 줄여 편집의 리듬에 속도를 냈으며, 정지된 카메라 대신 들고찍기 방식을 빈번하게 사용했다. 촬영은 한 달 만에 끝났다. 허 감독에게 '호우시절'은 연출 인생 2장의 시작인 셈이다. 주연배우 정우성은 출연작 '비트' 때부터 허 감독과 친분이 있었다. 현장과 사석에서 만나며 정우성을 지켜보며 허진호 감독은 "가까이 있을 때의 정우성이라는 사람의 느낌"을 담아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영화나 TV에서 보는 느낌이 아니라 옆에 있을 때 정우성이라는 사람의 느낌이 있어요. 그동안 영화에서는 일상생활과는 동떨어진 인물로 그려졌던 것 같은데 일상생활의 인물로 가져오면 어떨까 생각했죠. 이 영화 때문에 정우성을 처음 만났을 때도 '완전히 다른 캐릭터가 아닌 네가 갖고 있는 일상적인 모습을 옆에서 보는 것처럼 그리면 재미있을 것 같다'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호우시절'은 허진호식 '비포 선셋'과도 같은 작품이다. 그러나 그 작품보다 훨씬 맑고 투명하다. 영화 속 시간과 영화 밖 시간이 일치하도록 제작된 '비포 선셋'보다 3박4일의 '호우시절'은 더 긴 시간을 품고 있지만 오히려 단조롭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것은 '호우시절'이 사건보다 감정의 변화를 좇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감정의 파고는 높지 않지만 '호우시절'은 제법 다채롭고 치밀하며 섬세한 동시에 극적인 영화다. 좋은 비가 때를 알듯, 좋은 영화도 때를 아는 모양이다.
고경석 기자 kave@asiae.co.kr사진 박성기 기자 musictok@<ⓒ아시아경제 & 스투닷컴(stoo.com)이 만드는 온오프라인 연예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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