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대우의 경제레터] 토종의 힘

임진왜란이 끝나고 퇴각하던 한 왜장이 조선반도에서 포획한 호랑이 한 마리를 선창 밑에 가두고 출항했답니다. 막부에 바칠 선물이기에, 입항할 때까지 태백산 호랑이의 용맹스런 기풍이 그대로 남아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간식용으로 토종 진돗개 4마리를 함께 우리에 넣어 줍니다. 그런데 며칠 후 본토에 상륙해 선창뚜껑을 열었더니 호랑이는 간 데 없고, 통통하게 살이 붙은 진돗개 4마리만 그 창고를 지키고 있었다죠. 입가엔 피 묻은 미소까지 띠고서... 속담대로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만 남긴 것입니다. 사실대로 막부에 보고하니, “죽은 호랑이보다 살아남은 조선 개가 더 보배가 아닌가!” 하거늘. 그날 이후 혈통을 보존해, 오늘날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국견(國犬) '아키다 견(犬)'으로 키웠다고 합니다. 아마도 조선 개 4마리는 태어난 지 며칠 안 된 강아지였을 겁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 그대로 강아지 눈에는 4대 1로 수적인 우세만 보였을 테고, '죽기 아니면 까물어 치기'로 사생결단 합세해서 대들었을 것입니다. 마침 임란직후라서. 강아지들은 전시에 이순신 장군께서 평소 강조하신 말도 크게 참고했을 테지요.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는다” (死卽生 生卽死) 그렇다고 호랑이는 뭐 참고할 좋은 말이 없어서 그리 허망하게 당했을까요? 아주 먼 옛날에는 호랑이가 담배피던 시절도 있었다고 하는데, 야생의 세계에서 호랑이의 명예를 생각해서라도 이쯤에서 강아지들과의 치열한 전투과정은 상상에 맡기고 더 언급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당시 호랑이는 난생 처음 타 보는 판목선 바닥에서 극심한 배 멀미에 시달려 기진맥진한 상태로 겨우 잠이 들었을 겁니다. 또한 호랑이 간식으로 선발된 허기진 강아지들의 사료는 미처 준비하지 못했기에, 먹을 게 없어 굶주린 나머지 어쩔 수 없이 호랑이를 뜯어먹었다면 긴급피난행위가 되지요. 잘못은 강아지 사료를 미처 준비 못한 왜장에게 있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일본 아키다 견의 족보 왜곡을 위해서 죽은 조선호랑이 한 마리를 두 번 죽인 또 하나의 역사왜곡으로 전해오는 얘기입니다. 4년 전 WBC대회를 창안한 야구종가 미국이 이번 2회 대회만큼은 반드시 우승 한번 해보려고 온갖 아이디어를 짜낸 결과가 기이한 대진방식이었습니다. 한 경기에서 두 나라가 결승전에 오르기까지 무려 5번이나 맞붙는 방식은 전무후무한 경기왜곡에 해당됩니다. 그동안 막강한 국력으로 국제사회에서 무력분쟁과 인권에 이르기까지 부동의 심판자 역을 자처하던 USA가 어쩌다 저토록 비겁하게 변해 가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정식 야구팀만 4000개가 훨씬 넘는다는 70년 전통의 일본야구에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마지막까지 숨통을 물어뜯고 흔들었던 처절한 흔적들. 야구공에 머리통을 맞아 금이 간 플라스틱 헬멧을 쓰고 사력을 다해서 2루 베이스를 향해 달리던 모습과, 슬라이딩 순간 깨어지며 나뒹굴던 파란 헬멧조각들, 선수들의 가슴팍과 엉덩이에 묻은 다저스 구장의 한 맺힌 붉은 흙들을 우리 대표선수들은 잊지 못할 것입니다. 9회 말 투아웃 이후에도 그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모두 일어서서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비록 준우승에 그친 한일야구 대전이지만 정정당당하게 싸운 한편의 감동적인 드라마였습니다. 하지만 우승한 일본팀에 있어서 한국팀은 여전히 간담을 서늘하게 한 살아있는 호랑이로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겠지요. 몇 해 전 야생 멧돼지들의 잦은 출몰로 농사를 망친 어느 시골농가의 농부가 TV카메라 앞에서 하던 생생한 증언이 생각납니다. “동물원 축사에 가서 호랑이 배설물 한 봉지를 얻어 밭 주변에 뿌려놨더니, 그 냄새만 맡고도 사나운 멧돼지가 얼씬도 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동물원에서 그거 좀 얻겠다고 줄을 서지만 없어서 못 준데요. 글쎄 그게 뭐라고...” 조선의 토종들은 이렇게 끈질기게 살아남아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있습니다. 호랑이에 맞섰던 토종강아지나, 토종야구처럼 말입니다. 시사 평론가 김대우(pdikd@hanmail.net) <ⓒ아시아 대표 석간 '아시아경제' (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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