낱말
부채는 '부치다'에서 나온 말이다. '부치다'는 참으로 여러 가지 뜻을 지녔다. 편지를 부치다 할 때는 '보내다'의 뜻이고, 힘이 부치다 할 때는 '모자라다'의 뜻이고, 전을 부치다 할 때는 프라이팬에 기름을 묻혀 음식을 익히는 것을 말하고, 논밭을 부치다 할 때는 '빌려서 경작을 하다'라는 의미가 된다. 부채를 부치다 할 때는 '바람을 일으키다'의 뜻이 되는데, 다른 곳에선 거의 쓰이지 않고 오직 부채를 목적어로 하는 타동사로만 쓰인다. 선풍기가 아무리 바람을 일으켜도 부친다고 하지 않고 에어컨도 부친다고 하지 않는다.
부치는 것은 부채의 넓은 면을 이리저리 흔들어 바람을 일으키는 행위인데,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시원한 기운이 일어나는 것을 옛사람들은 신기하게 생각했다. 화담 서경덕은 대체 이 바람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에 대해 고민하다가 기(氣)철학의 단서를 찾아내기도 한다.
부채는 여름 한 계절만 필요한 물건이다. 봄에도 필요 없고 가을에도 필요 없으며 겨울에는 전혀 쓸모가 없다. 하지만 한여름의 찌는 듯한 더위를 달래는 수단으로 이보다 요긴하고 손쉬운 것이 없다. 선풍기니 에어컨이니 신문명이 이미 더위를 정복했다고는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갑작스럽게 더위에 직면할 때는 여전히 부채가 유연하게 인간의 니즈를 맞춰 주는 '뉴미디어'이다. 겨울을 이기는 데 꼭 필요한 것이 난로라면 여름에는 단연 부채이다. 하지만 제철이 지나면 참 뻘쭘해지는 사정 때문에 하로동선(夏爐冬扇ㆍ겨울난로 여름부채)이란 말이 나왔다.
선(扇)자를 들여다 보면 지게나 집을 가리키는 호(戶) 아래에 날개를 가리키는 우(羽)가 들어있다. 날개를 싣고 다니는 지게이거나 날개가 달린 집이 바로 부채라는 것이다. 나비나 새가 날개를 퍼득여 바람을 차며 이동하는 것에서 부채를 착안했다는 암시일까. 부채를 '날개집'이라고 한 그 표현이 놀랍도록 멋지다.
흔히 볼 수 있는 부채로 합죽선(合竹扇)이 있는데 겉대를 맞붙여 살을 만들고 종이나 헝겊을 발라 만드는 부채이다. 대나무 살들이 합쳐진다 하여 합죽이다. 살들이 합쳐지는 사북에는 고리를 다는데 은이나 백동, 놋쇠를 쓴다. 날짐승의 깃을 뽑아 만든 것은 백우선이라고 하고, 대나무로 바구니 엮듯 만든 부채는 팔덕선(부들부채)이라고 하는데 무거운 게 흠이다. 또 밀짚으로 만든 삼각형 부채도 있는데, 이것은 되림부채라 했다.
합죽선에 붙여진 종이나 비단에는 글씨나 그림으로 장식을 하기도 한다. 부채 예술은 옛사람들이 예술의 향취를 일상화하는 좋은 소재였다. 추사 김정희의 부채그림 지란병분은 당대의 예술가들이 저마다 팔을 걷어 한 수씩 적어 넣은 예술의 콘서트같은 작품이다. 굳이 정교하고 세련된 꾸밈에 애쓰지 않고 졸박하게 그려낸 지초와 난초의 향기가 부채질 끝에 흘러나올 듯하다. 옛사람들은 더위를 쫓는 부채 하나에서도, 인간의 기품과 인격적 성취를 떠올렸다. 호들갑스럽게 부채질을 하여 땀을 식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더위를 음미하는 마음에 있다고 생각한 까닭이리라.
빈섬 이상국(편집부장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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