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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혜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 피카소는 왜 먼 '한국 전쟁'을 그렸나
최종수정 2019.09.11 09:25기사입력 2019.09.11 09:25

1930년대 파시즘에 반발 공산당 활동…'게르니카'로 反파시즘 입장 표명
'한국에서의 학살' 미국 비판적 시선…실제로는 한국에 대해 아는 바 없어
단순하고 추상적 표현으로 전쟁 묘사…'약자에 대한 핍박' 그린 작품 평가

[이미혜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 피카소는 왜 먼 '한국 전쟁'을 그렸나 이미혜 예술사저술가·경성대 외래교수

1969년 6월9일 자 일간 신문들이 전한 소식은 당대 한국 사회의 '빨갱이 알레르기'를 잘 보여준다.


내용인즉슨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공안부가 '피카소'라는 상표가 붙은 크레파스와 그림물감을 제조·판매하는 화학공업회사 대표를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는 것, 유명 코미디언 곽규석이 자기가 진행하는 쇼 프로그램에서 스페인 화가 파블로 피카소(1881~1973)를 찬양하는 듯한 발언으로 정보기관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는 것, 어떤 방송 드라마에 '피카소'라는 별명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자 제작진을 불러다 경위를 조사 중이라는 것 등이었다.


이는 피카소가 빨갱이였기 때문에 벌어진 해프닝이다. 피카소는 제2차 세계대전 후 공산당원으로 활동했고 소련 정부로부터 '레닌 평화상'을 받았다. 공안 당국의 관점으로는 골수 빨갱이였다. 한국에서 그를 찬양하거나 광고에 이용하는 것은 반공법 위반에 해당했다. 피카소가 한국전쟁을 소재로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1951)'도 공산당을 선전하는 그림으로 인식됐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공산당 선전이라기보다 한국전쟁에 개입한 미국을 비난하는 내용이다. 사람들은 이 그림의 모티브가 된 사건으로 1950년 10월 황해도 신천군에서 벌어진 미군의 양민 학살을 꼽거나 1950년 미군이 북한 주민들에게 생화학 무기를 사용한 사건을 꼽기도 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둘 다 가능성이 희박하다. 두 사건은 피카소가 그림을 그리기 전 발생했지만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림이 완성된 후이기 때문이다.


신천군 학살 사건은 1952년 국제 사법단체가 작성한 보고서를 통해 국제사회에 알려졌다. 미국이 한국전에서 생물병기를 사용했다는 주장은 1952년 중국이 유엔(UN)에 제소함으로써 알려졌다.


마지막으로 1950년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을 거론하는 사람도 있다. 이 사건은 오랫동안 묻혀 있다 몇몇 생존자에 의해 1990년대에 알려졌으므로 고려할 대상이 못 된다. 이 그림은 특정 사건을 소재로 한 것이 아니라 전쟁의 일반적 참화를 묘사했다고 봐야 한다.

[이미혜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 피카소는 왜 먼 '한국 전쟁'을 그렸나 파블로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1951년(합판에 유채·110×210㎝·피카소미술관·프랑스 파리)

그런데 피카소는 어쩌다 공산당원이 돼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1930년대에 파시즘의 위협이 커지자 그 반작용으로 프랑스 파리의 지식인들은 급진적으로 변했다. 피카소와 함께 활동한 초현실주의 그룹의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를 비롯해 알베르 카뮈, 장 폴 사르트르, 앙드레 지드 등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이자 예술가들이 공산당에 가담하거나 공산주의에 기울었다.


이 시기 공산당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외로이 파시즘에 맞선 공화군을 지원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달려갔다. 나치 점령기에는 레지스탕스 운동의 핵심 세력을 이뤘다. 그 과정에서 피 흘리는 희생을 치른 공산당은 2차 대전 후 프랑스 정치와 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게르니카(1937)'를 그려 파시즘에 반대하던 피카소가 다른 예술가들과 함께 공산당에 가입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공산당은 피카소의 명성을 선전에 이용했고 피카소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문제는 피카소의 예술이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거리가 멀다는 점이었다. 공산당의 관점에서 보면 피카소의 작품은 퇴폐적 형식주의의 산물이었다. 1951년 프랑스 공산당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화가 앙드레 푸즈롱을 당의 공식 화가로 발표하고 그의 전시회 '광산 지역에서'를 대대적으로 띄웠다.


피카소는 자존심이 상했다. 저까짓 애송이보다 내가 훨씬 나은데! 자극받은 피카소는 공산당이 좋아할 만한 정치적 주제를 다루기로 작심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작품이 '한국에서의 학살'이다.


피카소는 공산당원이었을 뿐 아니라 스페인 내전 당시 미국의 대자본가들이 파시스트 진영인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을 지원한 일을 잊지 않고 있어 미국에 비판적이었다.


[이미혜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 피카소는 왜 먼 '한국 전쟁'을 그렸나 파블로 피카소 [사진= 연합뉴스]

화면 왼쪽에는 여인네와 아이들이 모여 있고 오른쪽에는 이들에게 무기를 겨눈 병사들이 있다. 뒤편에는 포화에 부서진 건물과 찢겨나간 계곡이 보인다. 가녀린 여인들과 건장한 군인들이 대조적이다. 아기를 안고 있거나 뱃속에 아기를 갖고 있는 여인들은 무력하나 생명을 보듬고 있다. 군인들은 에너지가 넘치지만 그 힘은 공격적이고 파괴적이다. 여인들의 얼굴은 슬픔과 두려움으로 일그러져 있다. 가운데 있는 어린 소녀만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또는 도움을 호소하듯 말간 얼굴로 관객을 마주 보고 있다.


군인들은 여인과 아이들 쪽으로 일사불란하게 무기를 겨누고 있지만 대오 자체가 무질서하고 혼란하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는 투구 또는 화생방 훈련을 할 때 쓰는 마스크 같은 것이 대신하고 있다. 표정을 알 수 없는 군인들은 멍청하고 둔한 외계인 같아 보인다.


피카소는 이런 식으로 전쟁의 어리석음과 맹목성을 조롱했다.


그러나 이 그림에 대한 반응은 영 신통치 않았다. 프랑스 공산당은 공개적으로 이 작품을 거부했다. 민중의 이미지가 영웅적이거나 비극적이지 않은 데다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지도 않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전후의 젊은이들은 늙은 천재 피카소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두 해 뒤인 1953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의 초현실주의를 주도한 시인 루이 아라공은 자기가 주간으로 있던 문예지 '레트르 프랑세즈'에 싣기 위해 피카소에게 스탈린의 초상화를 부탁했다. 피카소는 위대하신 당 서기장 동지를 캐리커처처럼 묘사했다. 이에 공산당이 발끈하자 아라공은 난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의 예술이 공산당으로부터 호응받지 못하자 피카소는 공산당에 대한 흥미를 잃어갔다. 당시 사회적으로도 공산당에 대한 열광이 시들해지고 있었다.


1956년 소련이 자유화 운동에 나선 헝가리를 탱크로 깔아뭉개고 1968년 체코 '프라하의 봄'을 탄압하면서 지식인들은 공산당에서 대거 이탈했다. 1960년대 서구 경제가 황금기를 누리고 전후 신세대가 성년에 도달했는데 공산당은 새로운 사회를 따라잡지 못하고 낡은 구호만 반복하다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했다.


서구에서 공산당의 인기가 날로 시들해지고 1960년 미국 사회학자 대니얼 벨의 저서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베스트셀러로 등극했으나 1969년의 한국에는 냉전 논리가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공공연히 피카소를 추켜세웠다간 잡혀가 경을 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적어도 1970년대까지 한국에서 미국을 비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한국 사람들에게 미국이란 공산주의의 마수로부터 한국을 지켜준 구원자이자 전후 한국이 거지꼴을 하고 있을 때 경제적으로 원조해준 천사 같은 맹방이었다. 이때 청소년기를 보낸 어르신들이 요즘 광화문 집회에서 성조기를 휘두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피카소는 92세까지 장수하면서 다양한 장르의 무수한 작품을 남겼다. 사람들은 그의 대표작으로 '게르니카'를 떠올리지만 정작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작품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 때 북부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가 겪은 참상을 묘사하고 있다. 가로 777㎝, 세로 349㎝의 거대한 캔버스에 충격적이고 상징적인 이미지들이 포개지고 뒤엉킨다.

[이미혜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 피카소는 왜 먼 '한국 전쟁'을 그렸나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1937년(캔버스에 유채·349×777㎝·레이나소피아미술관·스페인 마드리드)

바로크적 장엄함이 넘치는 '게르니카'와 비교할 때 '한국에서의 학살'은 단순하고 추상적이다. 피카소는 한국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따라서 조국 스페인에서 일어난 참상을 묘사할 때와는 태도나 표현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1937년 고국에 있는 어머니를 걱정하고 파시스트의 만행에 분노하면서 '게르니카'를 그릴 때와 1951년 세계적 예술가의 반열에 올라 젊은 애인 프랑수아즈 질로와 행복한 삶을 누리던 때가 같을 수도 없는 일이다.


'한국에서의 학살'이 지닌 추상적 측면은 공산당으로 하여금 거부 반응을 일으키게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는 되레 그림의 장점이 됐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한국전쟁이라는 특정 역사가 아니라 약자에 대한 핍박을 표현한 작품이 되고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성까지 얻게 됐다.


1956년 폴란드인들은 자유를 외치며 바르샤바 거리에 '한국에서의 학살' 복사본을 내걸었다. 미국을 비난하는 그림이 소련을 비난하는 그림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1973년 피카소는 수천 점의 작품을 남기고 프랑스 남부에서 세상을 떠났다. 자기가 귀중하게 여겨 팔지 않았거나 '한국에서의 학살'처럼 팔리지 않은 작품들이었다.


이 즈음 프랑스는 예술품으로 상속세를 대납할 수 있는 법을 만들었다. 골치 아픈 상속 다툼을 벌이던 유족들은 작품을 국가에 기증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이 작품들은 파리 피카소미술관 컬렉션의 중핵이 됐다.


예술사 저술가·경성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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