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러라고 '순례' 효과본 틱톡·日
아마존·넷플·메타…'앙숙'도 화해 손길
사적 관계 중시 트럼프, 취임 전 친분 쌓기
미국 플로리다주 팜비치가 새로운 세계 정치·경제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선거에서 승리한 이후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 최고경영자(CEO)부터 주요국 총리까지 전 세계 정·재계 주요 인사들이 트럼프 당선인과 만나기 위해 플로리다주 팜비치 마러라고 자택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당선인은 1기 행정부 당시 마러라고를 ‘겨울 백악관’이라 부를 만큼 자주 머물렀지만 2기 들어서 마러라고의 정치적 중요성은 더욱 높아질 전망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이 같은 방문 행렬을 ‘순례’에 비유하며 "일부 정치 지도자들이 마러라고를 순례하고 트럼프 당선인의 승리 전략을 공유하고 배운다"고 평가했다.
‘앙숙’도 마러라고로…글로벌 CEO ‘순례’ 행렬
마러라고 방문 효과를 본 대표적인 사례는 틱톡이다. 아직 구체적 구제 방안이 나오진 않았지만 트럼프 당선인은 내년 1월19일 이른바 ‘틱톡 금지법(적대국의 통제를 받는 애플리케이션(앱)들로부터 미국인을 보호하는 법률)’ 발효를 한 달 앞둔 이달 22일(현지시간) "이 녀석(틱톡)을 한동안 놔둬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선거 운동 기간 틱톡에서 수십억 건의 조회 수를 기록하며 톡톡히 효과를 봤다는 것이다. 틱톡 금지법에 미국 사업을 접을 위기에 놓인 추쇼우즈 틱톡 CEO는 한동안 마러라고에서 머물며 트럼프 당선인과 접선을 시도한 끝에 지난 16일 면담을 했다.
지난 16일 트럼프 당선인과 손정의(일본명 손 마사요시) 일본 소프트뱅크그룹 회장과 공동 기자회견도 마러라고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초 손 회장의 1000억달러(약 145조원) 대미 투자 계획을 발표하는 자리였으나 트럼프 당선인은 관세, 우크라이나 전쟁, 외교, 규제 완화 등 차기 행정부의 핵심 정책 청사진을 쏟아냈다. 또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부인인 아베 아키에 여사와 손 회장의 방문에 힘입어 취임 전 정상 간 회동에 부정적이었던 기존 입장을 뒤집고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를 향해 "그들(일본)이 원한다면 그렇게 할 것"이라며 소통의 메시지를 보냈다.
특히 최근 트럼프 당선인과 ‘앙숙’ 사이였던 주요 기업 CEO들이 마러라고를 찾는 모습이 눈에 띈다. 그간 앙금을 씻고 화해 무드를 조성하기 위해서다. NYT에 따르면 지난 18일 트럼프 당선인은 마러라고에서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CEO와 삼각 만찬을 했다.
베이조스 CEO는 트럼프 당선인, 머스크 CEO와 껄끄러운 사이다. 트럼프 당선인은 첫 임기 때 베이조스 CEO가 사주로 있는 일간지 워싱턴포스트(WP)의 기사 제목부터 아마존의 세금 문제까지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베이조스 CEO와 머스크 CEO는 오랜 앙숙 사이로, 우주개발 분야에서 베이조스 CEO의 블루오리진과 머스크 CEO의 스페이스X가 거액의 정부 계약을 놓고 경쟁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대선 기간 분위기가 달라졌다. 베이조스 CEO는 이례적으로 WP가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공개 지지를 선언하는 것을 막았고, 최근 트럼프 당선인의 취임식을 위해 100만달러(약 15억원)를 기부했다.
지난 17일에는 테드 서랜도스 넷플릭스 공동 CEO와 만난 것으로 전해졌다. 서랜도스 CEO는 오랜 민주당 지지자로 그의 부인 니콜 애번트는 오바마 행정부에서 주바마하 대사를 지내기도 했다. 공동 창립자인 리드 헤이스팅스 회장도 해리스 부통령을 공개 지지했다. 그러나 관계 개선에 나선 것이다.
트럼프 당선인과 악연으로 유명한 앙숙 페이스북의 모회사 메타플랫폼의 마크 저커버그 CEO도 지난달 27일 마러라고를 찾았고 취임식을 위해 100만달러를 기부하기로 했다. 트럼프 당선인은 저커버그 CEO의 음모로 2020년 대선에서 패배했다고 생각해 저커버그 CEO와 적대적인 사이였다. 그러나 저커버그 CEO는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 당선인과 두 차례 이상 전화 통화를 하는 등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이 외에도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와 세르게이 브린 구글 공동창업자도 트럼프 당선인을 만났다. 한국에서는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이 트럼프 당선인의 장남 트럼프 주니어의 초청으로 마러라고를 방문해 트럼프 당선인과 만났다.
트럼프 당선인은 "1기 때는 모든 사람이 나와 싸웠지만, 이번에는 모든 사람이 내 친구가 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NYT는 "한때 그를 비판하거나 거리를 뒀던 사람들이 그와 관계를 맺으려고 달려가고 있다"고 밝혔다.
‘제2백악관’ 마러라고서 친분 형성 전략
정치인들도 마러라고 방문 행렬에 합세했다. 트럼프 당선인이 지난달 25일 불법 이민과 마약 문제를 들어 취임 직후 멕시코와 캐나다에 25%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하자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나흘 만인 29일 부랴부랴 마러라고로 갔다. 트뤼도 총리는 트럼프 1기 행정부 당시 앙숙으로 유명했지만, 관세 위협에 직접 트럼프 당선인 저택으로 달려간 것이다.
올해 마러라고를 가장 많이 찾은 정치인은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로, 3번 방문했다. 지난 9일에 트럼프 당선인, 머스크 CEO를 만났다. ‘영국의 트럼프’라 불리는 나이절 패라지 영국개혁당 대표도 마러라고를 방문해 머스크 CEO와 회동했다.
주요 인사들이 마러라고를 들락거리는 이유는 트럼프 당선인 취임을 앞두고 개인적 친분을 쌓기 위해서다. 트럼프 당선인은 공식적 관계보다 개인적인 유대를 중시하는 성향이다. 공적인 접촉보단 직접 전화하거나, 식사를 함께하는 등 사적인 교류를 선호한다.
대표적인 사례는 팀 쿡 애플 CEO다. 그는 트럼프 당선인의 첫 임기 때 로비스트를 보내는 대신 직접 전화하고 만났다. 트럼프 당선인의 딸과 사위 등 가족과도 가까이 지냈다. 쿡 CEO의 전략은 2019년 트럼프 당선인이 중국산 수입품에 10% 관세를 부과했을 때 힘을 발휘했다. 개인적 친분을 활용해 관세가 아이폰 가격을 인상해 삼성 같은 외국 경쟁사를 돕는다고 트럼프 당선인에게 직접 설명했고, 전자제품은 관세 예외 대상에 올랐다. 쿡 CEO는 지난 13일 밤 트럼프 당선인을 찾아갔는데 애플 현안 관련 도움을 요청한 것으로 추정된다. 쿡 CEO는 대선 전에도 트럼프 당선인에게 유럽연합(EU)의 과징금 문제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마러라고의 위상은 한층 높아질 전망이다. 전 세계 유명 인사들이 트럼프 당선인을 만나기 위해 몰려들면서 마러라고는 ‘제2백악관’이 됐다는 말까지 나온다. 통상적으로 대통령 당선인은 정권 인수 때 연방총무청(GSA)을 통해 워싱턴D.C.에 임시 사무실을 운영하지만, 트럼프 당선인은 GSA의 지원을 받는 대신 마러라고를 차기 행정부 본부로 삼았다. 2기 행정부의 ‘실세’ 정부효율부(DOGE) 수장 머스크 CEO도 최근 마러라고에 머물고 있다.
한편 마러라고가 제2백악관이 되면서 팜비치 인근도 들썩거리고 있다. 전 세계 고위 인사들이 몰려들며 주변 호텔은 이미 만실이다. 어떤 이들은 아예 팜비치에 집을 사기도 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플로리다의 민주당 텃밭 팜비치가 마가(Make America Great Again·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의 중심지가 됐다고 평가했다.
오수연 기자 syo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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