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빌라·단독주택 등 공존
1990~2000년대 다양성 황금기
체인점·로컬가게·사무실도 섞여
편리함 떨어졌지만 활기가 넘쳐
재개발·젠트리피케이션 등 영향
2010년 이후 기존 공동체 파괴
지역 생태도 철거돼 활기 잃어
도쿄처럼 소규모 개발 참고해야
매년 5월 초가 되면 도시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걷는 행사가 세계 여러 도시에서 열린다. ‘제인스 워크’(Jane’s Walk)다. 미국의 도시 이론가 제인 제이콥스(Jane Jacobs, 1916~2006)를 기억하기 위해 그의 생일인 5월 4일 앞뒤로 열린다. 서울에서도 몇 차례 이 행사에 참여하면서 서울을 아끼는 이들과 꽤 오랜 시간을 걸었다. 서울을 포함한, 여러 도시에서 제인 제이콥스를 기념하는 이유는 뭘까? 제인 제이콥스의 도시 이론은 서울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제인 제이콥스는 지금은 미국의 가장 유명한 도시 이론가로 꼽히지만 출발은 아웃사이더였다. 1961년 출간한 첫 책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은 1950년대 미국의 전면 철거 방식 중심의 도시재생 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해 화제였다. 제이콥스는 자신이 살던 맨해튼의 오래된 동네 그리니치빌리지의 고속도로 개발을 막기 위해 시민들과 힘을 모아 뉴욕시와 싸웠다. 당시 뉴욕시 당국은 컬럼비아 대학교를 2년 다니다가 중퇴한 제이콥스를 전문가로 여기지 않았다. 그저 ‘시끄러운 아줌마’로 취급했다. 하지만 결과는 시민들과 함께 1969년 고속도록 계획을 무산시킨 제이콥스의 승리로 끝났다.
제인 제이콥스의 도시 이론 핵심은 도시의 활기이며, 그 원천은 다양성에서 비롯한다. 제이콥스는 도시가 다양성을 창출하고 유지하려면 네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제시했다. 첫째는 지역에 주거와 상업 시설, 그리고 공공 공간이 공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걷기에 편한 짧은 블록의 구성이다. 셋째는 지어진 시기와 상태가 다양한 건물들의 구성이다. 건물이 다양할수록 다양한 계층이 살 수 있고 사무실과 상가도 다양하게 들어설 수 있다. 넷째는 높은 인구 밀도다. 즉 사람이 많이 살아야 활기가 있다는 의미다.
제이콥스의 이론적 배경으로 바라보는 2024년 말 서울은 어떨까. 서울은 활기찬 도시로 유명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점점 활기가 줄어드는 느낌이다. 다양성이 점차 약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제이콥스의 다양성 이론에 따르면 서울의 다양성 황금기는 1990년대와 2000년대였다.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독재 국가에서 민주 국가로 전환하던 이 중요한 시기에 서울은 지역마다 다양한 건물에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섞여 살았고, 상업군도 다양했다. 일부 아파트 중심으로 개발된 지역을 제외하면 같은 지역 안에 아파트, 빌라, 다세대, 단독 등 주택 형태도 다양했다. 대형 프랜차이즈의 체인점, 로컬 가게, 대기업의 지점과 작은 사무실의 스타트업 등이 섞여 있었다. 생활 수준과 편리함은 요즘과 비교해 떨어지긴 했지만, 그때의 서울은 확실히 다양하고 활기찬 도시였다.
그렇다면 2010년대 이후 서울의 다양성은 무엇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걸까. 크게 재개발과 젠트리피케이션을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서울에서는 전면 철거식 재개발이 계속해서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 낙후된 주택들이 사라지고 깨끗하고 쾌적한 새로운 주택들이 들어오고, 아파트 사이에 확보된 녹지를 통해 지역의 주거 환경은 개선이 된다. 무시할 수 없는 재개발의 장점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기존 공동체가 파괴되고 지역의 다양성이 상실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쉽게 간과할 수 없는 단점이다. 재개발 대상 지역은 보통 오래된 곳들이라서 오랜 세월 동안 차츰 들어선 건물들이 대부분이고, 이를 통해 다양한 건물들이 지역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접근성이 큰 도로 쪽에는 대체로 새로운 시설을 갖춘 건물들이 많아서 대기업의 대리점과 체인점들이 주로 차지하지만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오면 더 낡은 건물에 지역의 작은 노포나 저비용으로 창업한 인디 카페 등을 손쉽게 찾을 수 있다. 주택들은 대형 아파트 단지를 제외하면 형태가 매우 다양해서 오랫동안 살아온 나이 많은 집 소유주부터 원룸을 임대한 젊은 직장인까지 주민들의 형태도 다양하다. 전면 철거 방식의 재개발로 인해 눈에 보이는 건물만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이러한 지역 생태도 철거되어 활기를 잃게 된다.
세계 여러 도시들마다 오래전부터 젠트리피케이션을 겪고 있다. 간단한 문제가 결코 아니다. 서울에서의 젠트리피케이션 사례는 주로 강북 몇몇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데, 서울의 젠트리피케이션은 특징이 있다. 주로 상업지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건물 용도가 주거에서 상업으로 변하면서 지역 상주 인구가 감소하는 쪽으로 진행된다. 이러한 서울식 ‘상업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재개발과 마찬가지로 지역의 다양성이 없어지는 것은 물론이다. 상주 인구가 줄어들면서 많은 지역은 주거 기능을 상실하게 되는데, 새로 들어선 상업의 유형도 썩 다양하지 않다. 카페가 일단 압도적이고, 그 밖에도 대부분 유행하는 음식과 술을 파는 곳들이다. 전문점이 눈에 띄기도 하지만, 다른 곳에도 비슷한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어서 서울의 다양성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건물도 건물이지만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움직임도 썩 다양하지 않은 의미다. 유행에 민감한 가게들이 오래 사업을 유지하기는 그만큼 어렵다. 유행의 사이클이 끝나면 또 다른 유행으로 가게가 채워지고, 이런 사이클이 계속 반복되곤 한다. 다양성은 점점 더 멀어진다.
그렇다면 서울의 미래를 빼곡한 아파트 단지와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으로만 그려야 할까. 그렇게 두기에는 아쉬움이 크다. 서울의 다양성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재산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니 엄격한 규제는 정치적으로 용납하기 어려울 것이다. 서울과 비슷한 점이 많은 도쿄에서 조언을 얻는다면 어떨까. 도쿄는 전면 철거 방식의 재개발은 거의 없고 상업 젠트리피케이션도 심하지 않다. 대신 소규모 개발이 많이 이루어진다. 물론 사회 변화에 맞게 새로운 건물을 짓기도 하고, 낙후된 건물을 교체하기도 하지만 건물 규모가 작기 때문에 지역이 천천히 향상되면서 다양성을 유지한다. 상주 인구도 유지하면서 다양한 상업도 유지한다. 이로 인해 도시 전체의 활기도 유지한다. 제인 제이콥스와 도쿄는 인연이 없지만, 2024년의 도쿄를 제이콥스가 본다면 다양성의 네 가지 조건을 잘 지켜가는 도시로 여기지 않을까?
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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