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 감소 따른 가격 하락 우려도
멀티패터닝 DUV 반입 제한 시사
미국이 중국에 대한 인공지능(AI) 반도체용 고대역폭메모리(HBM)의 공급을 제한하는 추가 제재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긴장 속에서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당장 실적에 미칠 영향은 제한적이지만 향후 시장 진출 기회를 잡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 영업이 막히면 HBM 시장 전체적인 수요 감소, 가격 하락으로 이어져 회사 수익성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11일 업계에 따르면 주요 반도체 기업들은 앨런 에스테베스 미 상무부 산업안보차관이 'HBM을 중국이 아닌 미국과 동맹에 공급해야 한다'라는 취지로 한 발언한 것이 당장 중국 추가 제재에 들어간다는 뜻인지 확인 중이다. 이날 발언한 HBM뿐 아니라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공정 등에 관한 추가 제재에 들어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어 업계는 긴장하고 있다. GAA 공정은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부문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부와 TSMC의 주요 기술이다. 업계 관계자는 "지금은 어떤 사항도 확인할 수 없다"며 말을 아꼈다.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대중 HBM 수출량은 많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세부 데이터는 공개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다만 두 회사의 중국 매출은 늘고 있다. 중국이 미국 제재가 더 심해지기 전에 HBM 등 한국 제품 사재기에 들어갔다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지난달 공시한 반기보고서에 따르면 상반기 삼성전자 중국 매출은 32조3452억원으로 지난해 상반기(17조8080억원) 대비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스마트폰, 가전 등 다른 제품도 포함된 수치지만 중국 시장에서는 대부분 반도체로 매출을 늘린 것으로 전해졌다. SK하이닉스도 상반기 8조6061억원의 매출을 중국에서 냈다. 지난해 같은 기간 3조8821억원보다 두 배 이상 늘었다.
중국에서 HBM 수요가 늘면 HBM 가격이 올라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공급 업체 수익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반대로 미국 제재 때문에 중국 HBM 시장 성장 동력(모멘텀)이 떨어지고 수요가 급감하면 공급 업체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미국 대중 반도체 제재 범위가 확대되는 점, 오는 11월 미 대선에서 어느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중국과의 '강 대 강' 기조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 등도 우려스럽다는 말이 나온다.
에스테베스 차관이 멀티패터닝 장비인 이머전 심자외선(DUV) 추가 반입 제한을 시사한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이머전 DUV는 불화아르곤(ArF) 광원을 사용하는 장비로, 주로 멀티패터닝 공정에 활용된다. 멀티패터닝은 회로를 여러 번 나누어 순차적으로 노광하는 기술로, 미세한 회로를 그릴 수 있지만 수율(양품 비율)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업계와 학계에 따르면 이머전 DUV 반입이 제한되면 낸드플래시보다는 D램 사업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낸드는 단수가 높아 패터닝 단위가 크지만, D램은 그렇지 않아 10㎚(1㎚=10억 분의 1m) 초반대의 미세 공정을 위해 멀티패터닝 기술이 필수적이다. DUV는 7㎚ 이상 공정에서는 여전히 활용도가 높은 장비다. 다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지난해 10월 중국 내 사업과 관련해 '검증된 최종 사용자(VEU)' 자격을 확보했기 때문에 미국이 멀티패터닝 추가 제재를 중국에 가하더라도 제재 대상에서 빠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머전 DUV 제재가 중국 파운드리 기업 SMIC(中芯國際·중신궈지) 등을 겨냥한 정책인 사실도 업계를 긴장하게 만드는 요소다. 중국 화웨이 칩을 위탁생산하는 SMIC가 7㎚ 이하 공정에 성공한 것도 이 장비 덕분이었다. 7㎚ 이하 공정은 네덜란드 ASML이 생산하는 극자외선(EUV) 장비 없이는 구현이 불가능하다고 알려졌는데 중국이 DUV 장비로 통념을 깼다. 중국은 미국이 ASML EUV 장비 반입을 막으면서 수율과 수익성을 포기하고 이머전 DUV 장비로 7㎚ 이하 공정을 하고 있다. 미국이 이머전 장비 반입까지 막겠다고 나서는 것은 중국 파운드리가 더 이상 미국과 동맹국을 따라오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한국 기업도 중국 사업을 할 때 이 같은 정책 기조를 의식할 수밖에 없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과 SK가 지난해 10월 중국 내 반도체 공장에서 VEU 자격을 확보해, VEU 범위 내에서는 장비 업그레이드에 문제가 없다"며 "HBM을 소비하는 대다수의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는 중국 외의 기업"이라고 말했다.
문채석 기자 chaes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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