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인식전환 위해 근원적 개선 논의 필요"
자산운용사 23곳, 간담회서 현장 경험담 공유
두산그룹 기업재편안 논란 중심으로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8일 한동안 뜸했던 '이사의 충실의무' 논의 필요성을 다시 언급한 배경에는 최근 소액주주 피해 사례로 언급된 '두산그룹 기업재편안'이 있다.
이복현 원장은 이날 자산운용사 최고경영자(CEO) 간담회에서 "정부의 (자본시장 선진화를 위한) 노력에도 지배주주 이익만을 우선시하는 기업경영 사례가 여전히 반복되는 데 안타까움을 표명한다"며 "이제는 기업들의 철저한 인식 전환을 위해 이사의 충실의무와 관련해 원칙 중심의 근원적 개선방안을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사의 충실의무는 상법 382조의3에 명시된 조항이다. 미국, 영국에서는 이사회가 '주주'에 대해, 독일에서는 '대주주'가 다른 '주주'에 대해 충실의무를 부담하지만 한국에서는 이사가 '회사'에 대해 충실의무를 부담한다. 이 때문에 소액주주와 지배주주의 이익이 충돌하는 경우 이사회가 지배주주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림으로써 소액주주가 피해를 보기 때문에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됐다.
최근 상법 개정 필요성에 불쏘시개 역할을 한 곳은 두산그룹이다. 두산그룹은 최근 두산로보틱스와 두산에너빌리티 간 인적분할·합병, 두산밥캣과 두산로보틱스 간 포괄적 주식교환 등을 통해 두산밥캣을 두산로보틱스의 완전자회사로 이전하는 사업 구조 개편을 발표했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합병 비율을 놓고 논란이 일었다. 두산밥캣 1주에 두산로보틱스 0.63주가 배정되는데 두산밥캣의 기업가치가 저평가됐다는 것이다. 자산운용사들의 모임인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논평에서 "자본시장법 상장회사 합병비율 조항을 최대로 악용한 사례"라며 매출 규모가 183배 차이 나는 두 계열회사 주식을 1대1(금액기준)로 교환할 수 있게 만드는 30년 묵은 자본시장법 시행령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금감원 역시 두산 측에 증권신고서 정정 요청을 하며 합병 시너지를 소상히 밝히라고 주문했고, 두산 측은 이날(8일) 금감원에 정정신고서를 제출했다.
이는 국회에서도 지적받았던 사안이다. 앞서 이복현 원장은 지난달 25일 국회 정무위원회 업무보고에서 더불어민주당 김현정 의원의 상법 개정 필요성 관련 질문에 "개별적인 행위 규제 방식보다는 원칙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자산운용사들도 이날 이사의 충실의무 필요성에 공감한다는 뜻을 당국에 전달했다. 이날 발제를 맡았던 김민국 VIP자산운용 대표는 "밸류업을 위해서는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 도입과 집중투표제 의무화, 운용사의 스튜어드십코드 확대,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최혁재 프랭클린템플턴 본부장도 "밸류업 프로그램이 글로벌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 확대, 주주간 구조적 불공정 해소 등이 필요하다"면서 상장 계열사 간 합병·주식교환 시 가치평가 방법 개선 등을 예시로 들었다.
23개 운용사가 당국에 사전에 서면으로 제출한 답변에서도 최근 밸류업 행보 역행하는 두산, SK그룹 등이 소액주주 피해 사례로 언급됐다. 이날 간담회에서 진행된 1~2분에 걸친 릴레이 형식의 발언 기회에서도 일부 CEO들은 이사의 충실의무 필요성을 촉구했다. '주주이익의 공평한 보호', '일반주주의 가치 보호', '주주권 보호' 등이 공통된 키워드였다.
A자산운용사 대표는 "당국이 자산운용사들에 (의결권 행사 관련) 당부하는 겸 질책하는 자리였던 듯하다"며 "이사의 충실의무에 대해선 다들 입을 모아서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고 전했다. B자산운용사는 "공모냐 사모냐를 떠나서 운용사들 대부분이 이사의 충실의무에 대해선 필요하다는 인식이 있다"며 "두산그룹이라는 좋은 사례가 나왔기 때문에 관련 논의가 더 힘을 받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다만, 이사의 충실의무 관련 상법 개정 논의는 이해관계가 첨예하기 때문에 단기간에 끝나긴 힘들 전망이다. 기획재정부가 지난달 3일 발표한 '역동경제 로드맵'에 담긴 자본시장 선진화 방안에서도 이사의 충실의무를 확대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안이 제외됐다. 당초 상법 개정에 반대해온 것으로 알려진 법무부를 비롯해 기재부, 금융위원회 등 관계부처 간 긴밀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란 관측이다. 재계에서도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모든 주주로 확대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며 결사반대를 외치고 있다.
차민영 기자 bloomin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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