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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다이어리]여전한 ‘메리 크리스마스’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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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미국 일상 속 이야기들을 전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

얼마 전 미국 뉴욕 맨해튼의 라디오시티 뮤직홀에서 ‘크리스마스 스펙타큘라’ 연말공연을 보다 잠시 멈칫했다. 1933년부터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을 알리는 명물로 손꼽히는 해당 공연의 후반부에는 댄서들이 한 줄로 서서 알파벳이 적힌 주사위로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문장을 완성하는 장면이 나온다. 신나는 음악과 함께 반가운 크리스마스 인사를 받았음에도 어색함을 느낀 이유는 명료했다. 현지에서는 이미 한참 전부터 많은 사람이 의식적으로 이 인사말을 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뉴욕다이어리]여전한 ‘메리 크리스마스’ 논쟁 [이미지출처=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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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말이 사라지고 있다는 뉴스를 처음 본 지도 벌써 10여년이 훨씬 넘은 듯하다. 12월에 접어들며 맨해튼 곳곳에 크리스마스 트리와 장식이 가득하건만, 뉴요커들은 웬만해선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기독교인이 아닌 무신론자나 타신교자가 거부감을 느낄 수 있는 만큼, 종교색이 짙은 표현인 메리 크리스마스 대신 ‘해피 홀리데이(Happy holidays)’같은 가치중립적 표현을 써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서다. 이는 성, 인종, 약자에 대한 차별적 언어를 자제해야 한다는 ‘정치적 올바름(PC)’ 운동의 여파기도 하다. 연말 홀리데이 시즌에는 크리스마스 외에도 유대교 축제인 하누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축제인 콴자 등이 있다.


나 역시 지난해 한 친구로부터 "나는 크리스마스를 축하하지 않아"라는 말을 들은 후부터는 더 의식해서 해피 홀리데이를 사용하고 있다. 차별적 언어를 자제하겠다는 취지도 취지지만, 사실 기분 좋으라고 건넨 연말 인사말 하나로 괜한 잡음을 만들기 싫다는 조심스러움이 이유다. 뉴욕은 미국 내에서도 특히 진보적 색채가 짙은 지역으로, 다인종·다종교·다문화 특성을 갖고 있다. 따뜻한 마음을 담은 크리스마스 인사말 하나가 이곳에선 이렇게 복잡한 문제일 줄이야.


[뉴욕다이어리]여전한 ‘메리 크리스마스’ 논쟁 [이미지출처=AFP연합뉴스]

언제부턴가 미국에서 연말 인사는 정치 사회적 갈등과 분열을 보여주는 하나의 단면이 됐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연말 인사말을 두고 공방이 반복된다. 공개석상에서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여론의 비판이 쏟아지는가 하면, 반대로 보수 백인 기독교도들 사이에선 자신들의 문화가 공격받고 있다며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에 과하게 집착하는 모습도 확인된다. 이제 미국에선 어떤 연말 인사를 건네느냐 그 자체가 정치 사회적 의미를 띄게 된 셈이다.


대통령의 카드에 어떤 문구가 담겼는지도 매번 이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임기 내내 해피 홀리데이 문구만 사용했다. 반면 보수 기독교층의 표심 집결을 노린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과거부터 "메리 크리스마스를 되찾겠다"면서 인사말 갈등을 한층 가열시키는 행보를 보여왔다. 조 바이든 현 대통령은 메리 크리스마스와 해피 홀리데이를 병용하고 있다. 올해도 내년 대선을 노리는 정치인들의 카드 문구는 확연히 나뉠 것이다.



메리 크리스마스냐, 해피 홀리데이냐.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건네는 인사말이 나타내는 메시지가 ‘사랑과 포용’이 아닌, ‘분열’이라는 사실은 씁쓸하기 짝이 없다. 중요한 것은 분명 그 안에 담긴 진심일 터. 건네는 인사 안에 사랑과 배려, 포용이 담겨 있다면 메리 크리스마스든, 해피 홀리데이든 무엇이 문제일까.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친구, 지인 사이에서나 통할 만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미국을 둘로 나눈 인사말 갈등이 앞으로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다.




뉴욕=조슬기나 특파원 seu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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