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직기 회사에서 일하던 일본인 청년 도요다 키이치로는 시찰 차 찾은 미국에서 생경한 장면을 마주했다. 20세기 초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도로 곳곳을 누비는 자동차였다. 증기기관차 중심의 일본은 뒤처지고, 자동차의 나라 미국은 풍요롭다고 여겼다. 귀국 이듬해 관동대지진을 겪었다. 재난현장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구호물자나 무거운 자재를 실어 나르는 자동차의 힘을 실감했다. 자동차 사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주변에선 말렸다. 키이치로의 아버지 도요다 사키치는 일본 근대화 시기 발명왕으로 불리던 인물로 자동직기를 만들어 돈을 많이 벌었다. 잘 나가는 회사가 자칫 무모한 욕심 탓에 망할 것이라고 얘기하는 이도 있었다. 당시만 해도 미국 포드나 제너럴모터스(GM)의 자동차 부품을 가져다 조립해 파는 게 고작이던 시대였다. 기술 수준은 30년 정도 격차가 났다. 키이치로는 회사 경영진을 설득해 회사 한쪽에 자동차 부서를 만들고 뜻이 맞는 17명이 모여 미국 차를 분해해가며 연구했다. 20세기 후반 사세를 키워 세계 최대 자동차 회사가 된 도요타의 초창기 얘기다.
정주영 역시 우리 손으로 만든 자동차가 있어야 한다고 봤다. 해방 전후 차량 정비 일을 하며 자동차 사업과 연이 닿은 정주영은 한국에 진출한 포드와 제휴, 처음엔 차를 조립해 팔았다. 사회가 발전하고 나라 경제가 커지면 철도만으로는 부족하고 도로와 자동차가 필요하다고 봤다. 차가 많지 않던 시절임에도 고속도로를 닦고 자동차 사업을 시작한 이유다.
현대가 처음 들여온 포드의 코티나는 포장된 길을 주로 다니는 차였던지라 당시 비포장도로가 대부분이던 국내엔 맞지 않았다. 쉽게 고장 났다. 포드는 ‘비포장도로에선 운행을 자제하라’는 해결책을 내놨다. 한국 지형에 맞는 차를 개발해줄 의지가 없었고 기술이전에도 인색했다. 추후 한국의 첫 독자 개발모델 포니를 수출하는 과정에서 훼방도 놨다. 정주영은 훗날 회고록에서 대부분 이야기를 간결하게 적은 반면 현대차가 생겨나는 과정이나 포드와의 일화에 대해선 유독 자세하게 썼다. 그만큼 사업 초창기 고민이 많았고 맺힌 게 많았다는 방증이다.
40여년 시차를 두고 일본과 한국에서 있었던 일을 환기하는 건 앞으로 자동차 산업이 나아갈 방향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래 자동차 산업의 지형을 내다볼 수 있는 키워드가 담겨 있다. 이동수단이 한 사회에서 어떤 효용성을 띠는지, 기술 독립이 왜 중요한지 같은 물음에 답할 단초를 준다. 나아가 인류의 삶을 보다 낫게 하기 위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최근 열린 전기차 전용공장 기공식에서 반세기 전 선배 기업인들이 가졌던 오래된 꿈을 언급했다. 돈을 벌고 기술을 배우기 위해, 우리 차를 만들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인 꿈이 울산공장을 일궜고 아무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하고 고군분투한 게 지금의 현대차를 만든 자양분이 됐다며 고마워했다. 사키치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수작업으로 힘들게 실을 짜는 걸 옆에서 지켜보며 "편하게 해드려야겠다"는 원초적 일념으로 자동직기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이는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 이어져 도요타의 기업 철학으로 자리 잡았다.
미래 사회 모빌리티가 어떤 식으로 펼쳐질지 예상하긴 어렵다. 다만 앞으로를 준비하면서 과거를 되돌아보는 한일 대표 기업의 행보는 방향성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눈길이 간다. 인간을 향한 기술개발을 응원한다.
최대열 기자 dycho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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