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 제조국·마약 청정국·마약 소비국.’ 이 수식어들을 가진 국가, 바로 우리나라다. 1970~80년대에는 대만(원료 제공), 일본(소비시장)과 함께 주요 제조국으로 지목되며 ‘화이트 트라이앵글(White Triangle)’이라는 오명을 떠안았다. 당시 ‘마약왕’이라고 불리는 제조자들은 10년여간 2000kg이 넘는 마약을 생산했다. 1990년대 이후 정부는 대대적으로 마약 단속에 돌입했고, 2000년대엔 인구 10만명당 마약사범이 20명이 되면서 마약 청정국이란 명성도 얻었다. 자부심은 잠시, 한국은 현재 ‘마약 소비국’으로 불린다.
강남 학원가에서 음료수 시음 행사를 가장해 10대 청소년들에게 ‘마약 음료’를 배포하는가 하면 클럽에서 동료에게 몰래 마약을 탄 술을 먹여 성범죄를 저지른 사건이 왕왕 나온다. 10대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마약 하는 법을 배우고, 쉽게 마약을 구매한다. 최근 5년(2018년~2023년 7월)간 인천공항에서 적발된 마약 밀수는 170만6061g(8106억원)으로 집계됐다. 올해 여행객을 통한 밀반입은 7개월 만에 지난해 밀반입량보다 66.4% 증가했다. 한국으로 들어온 마약이 증가한 만큼 마약을 접한 사람들도 늘었다. 올해 들어 8월까지 단속된 마약류 사범은 1만8187명으로, 지난해 전체 단속 인원에 육박한다. 이 추세가 이어지면 올해 마약사범은 2만7000명이 넘는다. 같은 기간 마약을 접한 10대는 875명으로 지난해 전체(481명)보다 2배 많다.
마약과의 전쟁에서 이기려면 마약 사범에 대한 처벌로 끝내지 말고 치료·재활로 이어져야 한다. 대통령령 마약류 중독자 치료보호 규정 내에서는 중독 문제 개선을 위한 예산·정책을 반영하기에 한계가 있다. 기존 법률과 별도로 치료와 재활을 위한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남경필 경기지사는 올 초 아들을 마약 투약 혐의로 고발했다. 처벌받아도 아들은 마약을 끊지 못했다. 결국 아들과 합의해 아버지가 직접 경찰에 전화했다. 마약 중독은 정신질환 중 하나다. 마약으로 뇌가 자극되면 쾌락을 느끼게 하는 도파민 분비가 급증한다. 이후 혈중 도파민 농도가 떨어지면 과민반응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마약은 한 번의 투약으로도 뇌 손상을 일으킬 수 있다. 강한 중독성도 유발한다.
마약 사범에 대한 치료 환경은 부족한 실정이다. 전국 마약류 중독자 치료 전문병원 21곳 중 인천 참사랑병원, 경남 창녕 국립부곡병원 2곳이 주로 중독자 치료를 하고 있다. 나머지는 전문 의료진 부족 등으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마약퇴치운동본부 중독재활센터와 약물중독 치료 공동체 다르크 등도 있지만, 어림없다. 내년 정부 예산은 어떨까. 보건복지부가 요청한 내년 중독자 치료 관련 예산의 85%가 삭감돼 올해와 같은 4억1600만원만 편성됐다.
필로폰 투약 혐의로 기소된 아이돌 그룹 위너 출신 가수 남태현씨는 현재 인천 다르크에서 24시간 생활하고 있으며, 인천 참사랑병원으로 약물 치료를 받으러 다니고 있다. 남씨는 "현재 있는 재활시설에는 20명도 안 되는 친구들이 머물고 있다"면서 "현장에서 매일같이 느끼는 바로는 약물 중독자들이 많이 늘고 있지만, 솔직히 지원이 너무 부족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일관성 있는 전달체계를 위한 컨트롤타워도 필요하다. 지금은 마약류 대응 정책을 추진하는 정부 부처와 기관이 제각각 목소리를 내고 있어 마약 문제를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사회 전체를 흔드는 마약 확산을 막기 위해선 올바른 대책이 우선이다.
임혜선 바이오중기벤처부 차장 lhsr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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