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화학 탄소중립 딜레마]②
풍력발전을 돌릴 때 바람개비 날개 블레이드는 석유화학 제품이다. 도로 위를 달리는 전기차 엔진인 배터리도 석유화학 소재다. 인공지능(AI)이나 로봇을 구성하는 소재도 마찬가지다. 석유화학은 모든 산업의 근간이 되는 업종이자 탄소 배출량 2위 업종이다. 그러다 보니 딜레마가 생긴다. 지난달 31일 열린 ‘석유화학산업 미래전략 토론회’에서도 석유화학업계의 탄소중립 해법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2050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가 주최하고 대한상공회의소, 한국석유화학협회가 주관한 이 토론회엔 정부·산업계·학계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전문가들은 어떤 식으로든 기업과 정부가 함께 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상준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탄소중립은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기업 혼자, 정부 혼자 노력해서는 달성할 수 없다”고 했다. “기업이 혁신 기술로 새 제품을 만들어도 아무도 사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설명이다. 또 “정부는 플라스틱 물병이 탄소중립 소재로 만든 건지 기존 석유화학 소재로 만든 건지 소비자가 알 수 있는 인증 제도를 만들어 저탄소 제품이 우대받는 시장을 조성해야 한다”고 했다.
세계 최대 화학회사인 독일 바스프(BASF)의 정지민 상무도 “우리는 업계 스탠다드나 벤치마크 넘버가 아니라 실제값을 인증한 디지털 시스템에 넣어 자원추출부터 공장생산 출고까지의 모든 과정을 계산한다”며 “이를 통해 고객사들에 제품 탄소발자국 정보를 투명하게 제공할 수 있다”고 했다. 정 상무는 “기업이 지속가능한 기술 혁신에 나설 때 이를 상용화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며 “기업이 들인 노력만큼 순환경제를 이어가려면 국내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어야 한다”고 했다.
백진영 보스턴컨설팅그룹 파트너는 “탈탄소 규제가 과거와 달리 거시적, 일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며 “석유화학 업체들이 과거 납사 경쟁력뿐만 아니라 폐플라스틱 재활용과 바이오 베이스 원료에서 어떻게 경쟁력을 갖고 가느냐에 대한 숙제도 안고 있다”고 했다. 이어 “경쟁력은 곧 플라스틱 폐자원 확보와 연결된다”며 “국가에서 어느 정도 지원해주고 얼마나 협력할 수 있느냐가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고 했다.
단순한 제조기업을 넘어 소재 솔루션을 제공하는 기업으로 탈바꿈해 차별화해야 한다는 조언도 나왔다. 백 파트너는 “앞으로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고객 맞춤형 소규모 생산은 더욱 늘어나고 석유화학산업도 솔루션화될 것”이라며 “솔루션에는 화학 기술뿐만 아니라 제품 사용 기술도 포함된다”고 했다. 예를 들면 제품뿐만 아니라 페인트를 칠하는 방법인 기계적 기술과 관련 빅데이터도 함께 제공하게 된다는 것이다. 백 파트너는 “글로벌 석유화학 기업들은 솔루션에 관한 마케팅을 상당히 잘한다”며 “B2B 고객과의 시너지를 통한 마케팅이 한국 업체들에도 필요하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융합적 접근이 필수라고 조언했다. 이 교수는 “석유화학산업은 여러 방면의 기술 혁신이 필요해 독자적으로 할 수 없다”며 “저탄소 연료, 탄소포집·저장(CCS), 수소 등 에너지와 산업 부분을 연계해 융합 프로젝트를 발굴해야 한다”고 했다. 박은덕 아주대 교수는 “예타 과제 사업을 통해 9년간 탄소중립 산업기술을 연구해보니 환경부와 산업통상자원부가 더 긴밀한 연계 체계를 갖추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산업 부문에서도 철강과 석유화학 산업 간 연계해 탄소중립 핵심기술을 개발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탄소 배출 임계점을 설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김기동 딜로이트컨설팅 상무는 “유럽 등 석유화학 제품별로 탄소발자국을 측정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탄소 배출 임계점이 없다”고 했다. 김 상무는 “현대차도 유럽에 수출할 때 1㎞당 이산화탄소 배출량 상한선을 충족시켜야 한다”며 “석유화학 제품도 에틸렌 1t을 만들 때 탄소 최대 배출량을 정해놓을 필요가 있다”며 “국가가 그린 라벨제를 시행해서 소비자가 저탄소 석유제품이라는 것을 알고 쓸 수 있게 하면 친환경 제품이 늘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최서윤 기자 sycho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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